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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맑스코뮤날레(2011.6.2~4 / 서울대) "맑스주의와 코뮨" 세션의 발표문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이화영)에 대한 토론문이다.



어펙트[각주:1], 공동체, 문학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이라는 제목이 보여주고 있듯이 발표자의 관심은 문학과 공동체의 관계에 있다. 발표자의 말대로 공동체에 기반하지 않은 문학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주제는 그 자체로 새롭지는 않다.[각주:2] 그렇다면 문제는 이 새롭지 않은 주제에 대해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발표자는 그간 역사적으로 문학이 만들어 왔던 공동체들과 그러한 공동체와 관련하여 문학이 수행해온 역할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공동체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문학이라는 형태로 존재했던 근대문학과, 새로운 세계사적 조건 하에서 그러한 근대문학 혹은 국민문학의 일면성과 편협성에 대한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세계문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이 만들어낸 중심있는 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의 공동체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본 토론문은 이와 같은 발표문의 논의 흐름을 따르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낳는다는 의미의 생산적 토론을 위해서 발표자의 비판보다는 제안, 문학의 공동체와 관련된 논의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근대문학과 국민 혹은 민족과의 밀접한 관계는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라는 주제만큼이나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근대세계의 문학이 무엇보다도 국민문학으로 존재해왔다는 것, 근대문학이 민족의 형성, 국민국가의 건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그래서 어떤 민족은 땅도 없을 수 있고 국가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서사가 없다면 어떠한 민족도 오래도록 존속할 수 없다[각주:3]는 것이 일반적인 층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판단이기 때문이다.[각주:4] 이러한 근대문학은, 근대라는 시간성과 민족 혹은 국민국가라는 역사 정치적 실체가 겪고 있는(혹은 이미 겪은) 변화와 더불어 가장 발본적이고 철저한 층위, 즉 물질적인 층위에서 이미 비판되고 있는 탓에, 그것에 대한 담론적 비판이 오히려 낡아 보일 정도이다.

 

오늘날 유의미한 이론적 검토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존재 자체가 유물론적 층위에서 비판되고 있는 근대문학이 아니라 그러한 근대문학 비판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지닌 세계문학()일 것이다. 그런데 근대문학과 달리 세계문학의 뒤에 괄호와 함께 이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이미 양자의 차이를 설명해주고 있는바, 세계문학과 관련해서는 도대체 세계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는지 자체가 문제이다.[각주:5] 그러므로 발표문의 제3국민문학을 위한 허구적 외부, 세계문학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세계문학이라기보다는 세계문학론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를 국내로 한정했을 때,[각주:6] 세계문학론이 국민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기에 충분치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발표자의 진단 자체는 타당해 보인다. 현 시기 세계문학론은 세계를 ‘inter-national’의 관점에서, 즉 여전히 민족/국민을 기본단위로 하여 그것들 간의 관계를 사고하는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현재 지구화라는 개념이 가리키고 있는 사태의 발본적 새로움[각주:7]과 그 새로움의 일부로 진행되고 있는 민족/국민 범주의 근본적 변화에 주목하기보다 어떻게든 전통적 민족 범주의 유효성을 붙잡고 갱신해 보려는 이론적 지체 내지 퇴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문학론에 대한 발표자의 비판은 그 진단의 적실성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불충분하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세계문학론의 시작점으로 알려진 괴테의 세계문학론을 살펴보자라는 말로 시작된 논의가 괴테에 관한 논의에서 끝나버리고만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부 논자들이 세계문학론을 일차적으로 괴테 맑스적 기획의 계승으로 파악하고 있으며,[각주:8] 그런 점에서 괴테의 세계문학론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세계문학론과의 비판적 대결의 진정한 가치는 괴테와 맑스 시대에 잠재적이고 경향적인 형태로만 존재했던 지구화가 삶의 조건이 된 현재를 기반으로 할 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은 변화된 전지구적 문학환경에서 문학이 취해야 할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지금 이 자리에서 고민하고 있는 동시대 세계문학론자들과의 대결일 것이기 때문이다. 4국민문학의 외부에서 프랑코 모레티의 세계문학론이 다루어지고는 있으나, 그의 논의는 세계문학론의 일부로 다루어지기보다는 도리어 세계문학론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서 발표자가 생각하는 세계문학론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에 이르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고, 결과적으로 세계문학론에 대한 발표자의 비판이 전체적으로 초점을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욱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는 괴테의 세계문학론에 대한 논의도 그의 세계문학론은 강력한 국가공동체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며 또 그 열망을 유지하게 한 원동력인 것이다라는 강한 결론을 뒷받침하기에는 다소 헐겁게 느껴진다. 괴테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짤막한 잡지 기고문 등에서 세계문학에 있어서 독일 민족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발언들의 전체적인 뉘앙스에서도 세계문학을 국민문학의 극복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한 무언가로 사고하고 있다는 느낌이 감지되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세계문학에 향한 그의 열정과 노력 전체를 강력한 국가 공동체에 대한 열망으로 환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보편적 교류와 그러한 교류를 통한 민족 자체의 변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구절들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각주:9] 그 성취의 수준이 어떠하건 간에, 변화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구환경에서 문학과 공동체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고자 하는 주요한 시도 가운데 하나가 세계문학론이라면, 발표자 자신의 주장을 좀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세계문학론에 대한 논의가 좀 더 풍부하고 치밀하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토론의 초점은 역시 발표자가 행한 비판의 적실성보다는 제안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검토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발표자가 앞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근대문학의 공동체와 세계문학의 공동체가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문학의 공동체는 곧 어펙트(감응)의 공동체이다. 발표문에서 어펙트의 공동체의 특질로 이야기되고 있는 중심, 단일한 목적, 고정된 경계, 위계 등의 부재와 다른 신체-되기, 유일성(특이성) 등은 일종의 시대정신이라 할 만한 것들로 그 자체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으며, 발표자의 제안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반드시 소중하게 다뤄져야 할 가치들이다. 그러나 저런 특질들은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시절 자주 회자되고 있으며, 그런 만큼 문학의 공동체혹은 어펙트의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저 가치들의 구체적 내용, 관계, 역사적 실현조건 등이 더불어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좋은 말들의 나열이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토론자가 발표문에 대해 갖는 아쉬움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문제는 발표자가 어펙트의 공동체로서의 문학의 공동체를 다루는 방식의 몰역사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몰역사성은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에 대한 비판의 부적실함과도 관련되어 있다. 발표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은 각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대두와 민족국가의 형성, 민족국가의 쇠퇴와 전지구화라는 역사적 물질적 조건 하에 탄생해서 그 조건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생을 이어갔거나 이어가고 있는 역사적 개념이다. 문학과 공동체가 국민문학이라는 방식, 세계문학이라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결코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국민문학의 공동체를 상상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면, 그 때 상상은 맑스가 가치에 대해 관념적이라는 술어를 사용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지, 생각만 달리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의미로 새겨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각주:10] 그러므로 국민문학 및 세계문학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극복은 역사적 비판과 극복이어야지, 긍정적 평가의 대상인 중심 없는 공동체와 부정적 평가의 대상인 중심 있는 공동체의 항구적 대립을 설정한 뒤 전자에는 자신의 주장을, 그리고 후자에는 비판의 대상을 위치시키는 보편적 초역사적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중심, 목적, 위계, 경계 없는 공동체가 그토록 좋은 것인데 역사적으로 그렇지 못한 공동체가 압도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왜 그 역사적 공동체는 중심 있는 공동체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탐구하고 논하는 것이 역사적 비판이며, 중심 있는 것은 나쁜 것인데 국민문학 공동체와 세계문학 공동체는 중심이 있는 공동체이므로 나쁘다라는 식의 논리는 결코 저 역사적 비판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 몰역사성은 그대로 새로운 구상의 몰역사성으로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발표자의 제안에서 발표자 자신이 긍정하는 어펙트의 공동체에 대한 좋은 말들과 그 좋은 말들을 뒷받침해줄 인용들을 제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정작 고민하고 대답해야 할, 지금 이 시대에 그러한 공동체가 왜 요구되는 것인가 혹은 요구될 수밖에 없는가, 그러한 공동체를 생각하고 구성할 수 있도록 해줄 현실적 역사적 잠재력은 어디에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위한 자리는 발표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관점의 견지라는 측면에서는, 그 탐구방향의 적실성과 성취의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이 시대 최고의 화두인 지구화라는 문제와 대결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표문에서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세계문학론이 발표자의 문학의 공동체론보다 윗길에 있는 것 같다. 국민문학 역시 문학과 공동체가 맺는 관계의 역사적 현실태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긍정하고 있는 어펙트의 공동체앞에만 문학의라는 수식어를 배타적으로 허용하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사용도 이러한 역사적 지평의 결여라는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발표문에서 문학의 공동체는 초역사적 혹은 탈역사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역사적 관점의 결여라는 문제를 떠나, 어펙트의 공동체 구상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어펙트 개념의 이해 내지 구성이라는 문제만을 논하더라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발표자에 따르면 문학의 공동체는 타자와의 급진적 만남”, 즉 마주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마주침occursus은 발표자가 기대고 있는 들뢰즈의(스피노자의) 어펙트 개념에서도 역시 출발점을 이룬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출발점으로부터 어디를 향하느냐이지, 이 출발점 자체가 성공적인 어펙트의 공동체의 구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마주침은 늘 주어지는 것, 어찌할 수 없는 것, 필연적인 것, 그래서 인간의 삶조건 내지 존재조건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우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타자와의 마주침은 어펙트의 공동체 구성의 필요조건일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어펙트를 공동체 구성의 긍정적 원리로 삼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을 증가시키는 기쁨의 마주침과 우리의 힘을 감소시키는 슬픔의 마주침을 섬세하게 구분하고, 후자를 피하는 가운데 전자를 적극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이 필요하다. 공동체 구성에 필수적인 공통적인 관념의 형성은 오직 기쁨의 어펙트라는 도약판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각주:11] 이런 맥락에서 감응(어펙트)은 이렇게 불현 듯 덮치는 것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자들의 힘을 벗어난다는 발표자의 진술은 반만 타당하다. 들뢰즈(스피노자) 어펙트론의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핵심은 불현 듯 덮침이라는 수동의 존재조건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면서도 거기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능동의 상태로, 공통적인 것의 상태로, 힘의 증가의 상태로, 그러므로 우리의 힘을 벗어나는것이 아니라 힘을 조직하는 상태로 가는 길을 탐구했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마주침과 어펙트 그 자체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마주침의 조직화, 어펙트의 조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역사적 지형으로 들어서게 된다. 마주침의 조직화, 관계의 조직화란 우리네 삶과 사회의 조직화와 다른 것일 수 없으며, 그러한 조직화는 역사 이외의 다른 무대에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주침의 조직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반대 측면에서는 우리의 힘을 감소시키거나 파괴하는 슬픔의 마주침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어펙트의 공동체를 국민문학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와 구분하면서, 상상의 공동체에서는 이데올로기를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내용의 이해와 전달이 목적이었다면,[각주:12] 어펙트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감응(어펙트)의 경험, 공동성의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토론자가 보기에, 이처럼 앞서 국민문학 공동체와 세계문학 공동체를 문학의 공동체로부터 추방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국민문학과 국민국가의 경험을 어펙트의 경험, 공동성의 경험으로부터 간단히 배제해버리는 것은 발표자에게 마주침과 어펙트의 내적 구별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뿐이다. 국민문학의 공동체도 문학의 공동체이고, 국민국가의 경험도 어펙트의 경험, 공동성의 경험이지 않은가? 국민문학도 문학이고 세계문학도 문학이지 않은가? 때문에 중요한 것은, ‘우리 것만 공동체고, 어펙트고, 문학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 어떤 어펙트, 어떤 문학이어야 하는가라는 고통스러우면서도 지난한 과제를 껴안는 것 아닌가? 토론자로서는 발표문에서 이러한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문제는, 발표문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경계에서 비로소 발생하는 문제, 그래서 발표문의 문제틀 자체를 메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줄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가 발표문에 대한 비판일 수는 없다. 모든 글과 생각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한계 자체를 문제삼는 작업은 장기적으로 함께 탐구해보자는 제안일 수는 있어도 특정한 시점의 생각의 결정(結晶)일 수밖에 없는 글에 대한 비판으로는 공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예술 너머로의 어펙트의 확장, 더 정확히는 생산과 노동의 어펙트화로 정식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10년간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 전체는 비물질노동, 삶정치적 생산 등의 개념이 지시하는 생산과 노동의 근본적인 성격 변화라는 사태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 방대한 논의를 이 자리에서 다 풀어낼 수는 없겠지만 골자만 간략히 말해보자면 오늘날의 노동은 노동과정 끝에 완결된 물질적 모습으로 등장하는 전통적 의미의 상품 생산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어펙트의 생산, 그러므로 주체 그 자체, 주체들 간의 관계의 생산, 결과적으로 사회 혹은 삶 자체의 생산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각주:13]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에는 감각, 아름다움, 느낌 등의 어펙트적 속성이 노동의 핵심이 되어가고 있다. 말하자면 노동의 예술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통적으로 어펙트와의 관계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문학, 혹은 더 넓게는 예술 일반에게 회피할 수 없는 지난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이고도 어려운 문제는 오늘날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까지가 노동인지를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듯이,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노동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난망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각주:14] 사정이 이렇다면 어펙트를 통한 문학의 공동체를 모색하고 있는 발표문의 기획 역시 불가피하게 더 나아간 사유와 탐구를 요청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아직 여물지 않은 생각, 함께 더 다듬어가야 할 생각이지만, 아래와 같은 단상을 내어놓는 것으로 이 토론문을 마무리하고 싶다.

 

오늘날 어펙트의 공동체는 문학의 공동체라는 틀로는 충분하고 철저하게 사유될 수 없으며, 오히려 문학과 예술을 포함하면서 그것들의 전통적 지위와 성격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생산의 공동체, 노동의 공동체, 나아가서는 그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단 하나의 평면인 삶의 공동체라는 지평에서만 적실하게 다루질 수 있다.”

 

 

 

 

 


  1. 발표자는 들뢰즈의 개념(사실 들뢰즈가 스피노자로부터 가져온 개념)인 affect에 대한 번역어로 ‘감응’을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 affecus의 영어 ․ 불어 번역어인 affect는 신체의 ‘상태’를 의미하는 affectio/affection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들뢰즈에 따르면 그 핵심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 변이, 되기이며, 이 때 이행은 무엇보다 힘의 증가(기쁨) 내지 감소(슬픔)로서의 이행이고, 이 이행이 수동을 조건으로 하면서도 수동에 갇히지 않고 능동으로 도약할 수 있는 인간 존재/행위능력의 열쇠이다. 스피노자로부터 이어받아 네그리 ․ 하트와 들뢰즈 ․ 가따리가 빈번히 사용하고 있는 이 개념에 대한 역어로는 ‘변양’(『천 개의 고원』), ‘정서’(『제국』), ‘감화’(『시네마 1』), ‘정감’(『영화 1』), ‘감응’(『질 들뢰즈』), ‘정동’(『비물질노동과 다중』) 등 다양한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아직 대략적인 차원에서라도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토론자는 ‘느껴서感 응함應’이라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뉘앙스가 강조되고 있는 감응이라는 역어보다는 ‘정동情動’이라는 역어가 이행과 변이의 동적 이미지를 잘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합의에 이르기 쉽지 않으면서도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게 될 번역어 논쟁으로 귀한 토론시간이 허비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 하에 이 글에서는 ‘어펙트’라는 음역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2. 작가나 독자가 작품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상관없이, 문학은 그것의 재료이자 본질인 언어가 근본적으로 ‘관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공동체라는 문제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본문으로]
  3. 크리스띠앙 쌀몽, 「말의 학살」, 박준상 옮김,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 108면(김영희 ․ 유희석 엮음, 『세계문학론』, 창비, 2010으로부터 재인용). [본문으로]
  4. 이러한 판단에서 ‘일반적인’이라는 말과 ‘대체로’라는 표현이 품고 있는 일종의 느슨함은 불가피한 것이다. 근대문학이 민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관계의 양상에 대한 경험은 경험자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 판연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근대를 자신들의 서사로 구성하고 경험해온 유럽에 비해, 근대의 타자로서 타자의 근대를 바라보고 동경하고 거부해온 비유럽의 근대문학, ‘국민(민족)과 서사’에 대한 태도는 한결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등의 작업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복합성은 발표문의 주제도 본고의 관심사도 아니다. [본문으로]
  5. 이는 민족문학론을 주창해왔던 창비가 내놓은 『세계문학론』의 필자들이 세계문학의 정의 자체를 검토해야 할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 그것을 현실이 아닌 운동이자 기획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본문으로]
  6. 토론자는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 전반의 동향을 알지 못한다. 이 글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문학론’에 관한 논의는 발표문이 언급하고 있는 『세계문학론』에 관한 것으로 국한된다. [본문으로]
  7. 이 ‘새로움’에 관해서는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윤수종 옮김, 『제국』, 이학사, 2001 참조. [본문으로]
  8.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대표적인 논자로는 백낙청(「지구화 시대의 민족과 문학」, 『세계문학론』)이 있다. [본문으로]
  9.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보라. “여기서 반복해서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똑같이 생각해야 된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고, 단지 상대방의 입장을 서로 알고 서로 이해하며, 설령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존재 방식을 용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지금 살아서 노력하고 있는 문학자들이 서로 사귀고, 애정과 협동 정신을 통해 사회적으로 활동할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벌써 얼마 전부터 보편적 세계문학이 논의되고 있는데,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두렵기 짝이 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마구 뒤섞이고 온통 뒤흔들렸다가는 다시금 개별적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 모든 나라들의 국민들은 그들 자신이 많은 낯선 것을 인지하여 그것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곳저곳에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하던 정신적 욕구들을 느끼게 된 사실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체험으로부터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감정이 우러났으며, 정신도 지금까지처럼 문을 닫고 지내는 대신에, 다소간의 자유로운 정신적 교류 속에 함께 어울리고 싶은 욕구를 차츰차츰 느끼게 된 것이다.”(괴테, 안삼환 옮김, 『문학론』, 민음사, 2010, 252~258면 이곳저곳) [본문으로]
  10. 주지하다시피 맑스는 가치에 대해, 관념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 [본문으로]
  11. 이상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참조. [본문으로]
  12.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정말 “내용의 이해와 전달”의 문제인가? [본문으로]
  13. 이러한 입장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정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맑스 자신이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궁극적으로 자본 관계, 즉 사회 그 자체를 생산한다고 했으므로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정식화가 그리 새로울 것은 없다는 문제제기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통적 의미의 물질적 상품생산이 양적으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이다. 우선 이미 여러 곳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두 번째 논점과 관련해서는 삶정치적 노동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양적으로 거대한 물질적 생산과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어펙트의 생산이 물질상품 생산을 포함하는 생산 일반에 질적으로 헤게모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답변이 가능할 것이고, 첫 번째 논점과 관련해서는, 맑스 시대에는 상품을 매개로 해서 궁극적 심급에서 이루어지던 주체와 사회의 생산이 오늘날에는 노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더 풍부한 논의로는 Antonio Negri & Michael Hardt, Commonwealth, 2009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14. 사실 예술의 경계 확정을 둘러싼 문제 자체가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플럭서스 운동 등 예술의 특권적 지위를 가능케 하는 예술과 삶의 경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허물려는 시도들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이 시절 상황의 새로움은 그러한 문제제기가 전위적 성격을 띠는 ‘운동’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세계의 생산 그 자체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Antonio Negri, Art and Multitude, 2011과 제5회 맑스코뮤날레 발표문인 이종호, 「공통적인 것과 예술」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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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