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들 ― “평범한” 시민들, 계급들, “대중의” 당파들 ― 은 국가가 자신들의 존엄을 인정하고 행정이나 공적 공간에 시민인륜의 규범들을 도입할 것을 강제하기 위해 연대했다. [...] 우리는 그와 같은 주도권은 다중의 자율성의 정도가 충분치 않다면, 즉 자율적인 “자기의 실천들”이 다중을 구성하는 자들에 의해 영속적으로 발명되지 않는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대중들의 공포』, 69~70)
“시민인륜의 규범들을 도입할 것을 강제하기 위해” 다중들이 연대한 것이 아니라 다중의 자율성의 표현이 그러한 규범들의 도입을 강제한 것이다. 발리바르가 정당하게 파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일은 다중의 자율성의 정도가 충분치 않다면, 자율적 실천이 영속적으로 발명되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역으로 말해 모든 개혁의 형상들은 다중의 혁명적 역량이 그러한 일은 가져올 만큼은 자율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발리바르는 이러한 다중의 자율성의 정도가 잠재적으로 국가 혹은 공적 영역 그 자체를 필요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고양될 수 있는 가능성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하는 필요성은 부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파시즘으로, 즉 대중들의 자기억압 욕망으로 귀결될 가능성을 늘 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절대적 탈동일화(탈정체화)의 우선성을 인정하기를 주저하고, 때문에 탈동일화를 상대화하고 안정화해 줄 심급으로서의 국가(시민인륜은 기존 국가의 억압적 성격과 무능력을 동시에 치유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중의 자율성은 국가의 흠결을 치유할 수 있는 정도로만 요구되며, 그 이상의 자율성은 일종의 무율, 파시즘과 동일시된다. 자율은 국가와 파시즘 사이에서 진동한다. 결국 내기는 자율성에 대한, 세계에 대한 ‘믿음’에 걸려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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