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사람이냐 활동이냐

Chaos 2012/02/10 05:39

 

나는 사람이냐 활동이냐라는 문제틀 아래서 소규모 모임, 특히 운동을 목표로 하는 모임의 조직화 방식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문제가 제기되는 방식 자체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양자택일을 허용하는 문제인가, 활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활동을 하기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것 아닌가, 저런 이분법적 사고 자체가 조직화 문제에 관한 사유를 더욱 황폐화하고 결국 조직적 실패 내지 재앙을 초래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들은 그간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쌓아온 경험과 건강한 상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자 중 어느 쪽에 어떤 방식으로 포인트를 두는가에 따라 작지 않은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푸는데 참고가 될 만하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이 생각을 정리하고 풀어내보고 싶다. 위와 같은 방식의 문제제기가 조직화 문제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때문에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양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것이며, 나아가 나와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고 싸웠던 이들에게 조금이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쓰여지고 있다.

 
첫 번째 사례는 대학시절의 어떤 모임이다. 돌이켜 보면 모임의 성격을 어떤이라는 말로밖에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모임의 특수성이었다. 모임의 성원 중 일부가 대학시절의 초창기부터 개인적/조직적 유대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이 어떤모임의 시작 시점을 특정하는 일을 어렵게 하지만, 대체로 뜻이 맞았던 몇몇이 학회활동과 별도로 외부에서 세미나를 진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임의 맹아가 생겨났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몸담았던 학회는 시민운동적 법률운동을 모토로 법대 내에서 진보적 법률가 집단의 경향적 조직을 도모하던 곳이었지만, 법률전문가로서의 삶에 별 뜻이 없었던 나는 일찍부터 학내외에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 공부를 하며 그러한 공부를 기초로 한 문제의식을 키워가고 있었고, 다소 느슨하게나마 그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했던 선후배, 동기들이 세미나라는 이름의 집단공부 형태로 합류하면서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모임이 시작된 것이다. 공부의 내용과 문제의식은 묵직했지만 보통 수시간의 세미나와 그보다 두배 이상 긴 뒷풀이로 이어졌던 모임은 늘 활기를 띠었고, 모임의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른 곳에서 얻지 못했던 근원적인 생기와 성장을 획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모임의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 독특한 개방성이었다. 실체가 없는 모임이었지만 친구, 지인, 친구의 지인, 지인의 친구, 그들의 애인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합류했는데(물론 그들 전부가 끝까지 함께 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대부분 모임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의 호의적이면서도 강력한 권유와 그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느꼈던 모임의 기운 내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 어떤모임의 활기는 유별난 데가 있었는데, 그 활기는 무엇보다 사람의 변화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직접적 차원에서는 이 모임에 있는 시간 동안 다른 곳에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집중력, 균형감, 분별력의 고양을 보여주는 성원들이 있었고, 길고 더 깊은 차원에서는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이 모임을 통해 정서적, 지적 능력의 성장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깊은 기쁨을 경험했다. “내가 변화했고, 내 친구가 변화했다는 것이 구성원들이 아직도 기쁘게 기억하고 증언하는 이 모임의 위대성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200910월에 설립된 <연구공간 L>이다. L<다중문화공간 WAB>, <자율평론>, <다중지성의 정원> 등으로 이어진 한국의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운동 흐름에 다양한 시기에 결합한 20, 30대 젊은 연구활동가들이 만든 연구조직으로 시작부터 비교적 분명한 정치적 공감대와, 비슷한 조직 경험을 토대로 한 정서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L의 설립목적은 자율주의 맑스주의에 기반한 이론적 활동을 통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외적 목적 못지않게 우리의 공부와 활동 그 자체가 우리의 조직과 분리되지 않기를, 정동, 자율, 사랑, 공통적인 것 등의 자율주의적 개념과 원리들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조직화 원리가 되기를 희망했다. 대학시절 어떤모임의 사람의 변화라는 기적을 체험한 경험을 갖고 있는 나를 비롯한 일부 성원들은 그 기적의 재현을, 그것도 보다 명확하면서도 풍부하고 고양된 방식의 재현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꼭 그러한 경험을 전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L 구성원들은 사람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어쩌면 일정한 시기 동안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정동, 자율, 사랑, 공통적인 것은 적어도 조직화의 차원에서는 다름 아닌 사람 상호 간의 변화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쉬운 일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경험과 공부가 충분하다고 생각지도 않았지만, 우리에게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과 패기가 부족했던 것 같지는 않다. 20대는, 이 경우에는 30대도 원래 그런 나이라는 점잖은 진단은 이런 객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2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와 돌이켜보건대 우리가 그 사람의 변화라는 원대한 목표에 얼마만큼 가까이 갔는지는 미지수다. 사람에 따라 이런저런 판단들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위에서 말한 저 어떤모임과 달리 기쁘고 행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힘들고 지치고 우울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동이 감정으로, 자율이 개인적 리듬에 따른 조직적 느슨함으로, 공통적인 것이 일괴암적 집단성으로, 사랑이 정서적 친밀함으로 오해되는 일이 없었는지 또한 진지하게 성찰해볼 일이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고 현재의 실패를 과거의 성공 앞에 초라하게 전시하는 것이 사례 제시의 목적일 수는 없다. 당연히 사례 연구의 목적은 나아갈 방향의 탐색이다. 두 사례의 차이는 무엇일까? 참여했던 사람들의 덕의 차이? 추상적인 만큼이나 규명하기 힘들 뿐 아니라, 양쪽 모임에 참여했던 이들을 모두 아는 사람들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진단이다. 나는 문제 해결의 진전을 위해서 일정한 모임 안에서의 사람의 변화라는 과제의 달성을 어렵게 하는 일반적 장애들을 검토한 뒤 위 두 사례가 그러한 장애들과 어떠한 조건에서 만나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는지를 살펴보고 싶다.

 

사람의 변화라는 과제의 달성을 힘들게 하는 첫 번째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과제 그 자체의 지난함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도 어려운데 타인을 바꾸려는 것은 욕심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진실을 알고 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상투어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실제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몸과 두뇌와 가슴을 관통하는 수많은 선들이 쌓일수록, 즉 나이를 먹어갈수록 변화는 더욱 쉽지 않다. 더욱이 사람의 변화는 타인의 삶에의 개입이라는 거북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개입의 각도가 수평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약간의 기울어짐도 수직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되는데, 그 결과는 개입자의 오만함과 피개입자의 강한 거부감이다. 이러한 곳곳의 지뢰를 피해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지혜와 덕스러움을 요구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간적 지평과 관련된 두 번째 어려움은 사람이 특정한 모임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생각해보면 매우 당연하면서도 현실적인 이 어려움은 부르주아 사회 속에서, 부르주아적 관계들에 맞서 싸우려는, 즉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의 경우 한층 배가된다. 모임 밖으로 한발자국만 발을 떼도 온통 모임의 구성원리와 적대적인 힘, 가치, 원리들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만족스러운 변화를 목표로 하는 사고실험 속에서라면 일종의 사회적, 정치적 진공상태를 가정할 수 있겠으나 현실은 변해야 한다는 당위만으로 족한 진공이 아니다.

 

세 번째 어려움은 시간적 지평과 관련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해 사람의 변화라는 과제는 시간 속에서 완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인간의 덕스러운 상태는 위에서 언급된 공간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항상적 변질과 파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 결과 사람의 변화란 완결을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영구과제가 된다. 또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문제는, 사람의 변화가 과제라면 그러한 과제는 잠재적으로 인류를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인데 모임의 방식으로는 결코 그러한 과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은 무한한 시간조차도 그러한 과제 달성을 털끝만큼도 보장해줄 수 없는 최소한도의 논리적 필요조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모임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한, 아니 거의 승산 없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상의 세 가지 어려움과 관련하여 위 두 사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차이를 가져온 요인은 무엇인가?

 

대학시절의 어떤모임이 첫 번째 어려움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었던 이점은 구성원 대부분이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는 사정인 것 같다. 물론 이런 문제에서 생물학적 연령이라는 일반적 기준은 실패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20대 초반과 30대 초반이 쌓게 되는 경험의 두께, 그로부터 발생하는 변화에 대한 탄력성과 유연성의 차이는 고려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매우 다행스럽게도 어떤모임의 성원들 사이에는 자신의 삶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친구의 개입을 궁극적으로는 환영하는,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는 흔치 않은 태도가 대체로 공유되고 있었다. 3자의 눈으로 볼 때 다소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되어 언짢게 느껴질 정도의 관계맺음조차도 정작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깊은 우정의 교류로 여겨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L이 생물학적 연령에 따른 사회적 경험 축적, 그에 비례하는 외부껍질의 경화라는 관점에서 어떤모임에 비해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상호 간의 개입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담백한 관계와 래포(rapport)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L어떤모임에 비해 부족해 보인다. 이 점은 상당히 많은 시간, 관계에 따라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어떤모임에 비해, 짧지 않은 교제 기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직접적 접촉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없었던 L의 조건에 불가피하게 기인한 면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어려움과 관련한 차이는 두 번째 어려움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생물학적 연령 차이에 기인하는 변화 가능성의 차이는 경험의 두께라는 일반적 설명보다 각 연령대가 받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압력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보다 결정적인 설명력을 얻는다. L의 구성원들이 속해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후반까지의 연령대는 결혼, 경제적 자립, 일정한 성취에 대한 사회적 압력 등에 집중적으로 노출되는 시기로, 구성원 상호간의 변화라는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에서 작용하는 그러한 원심력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구심력을 필요로 하는데, 기존의 사회에 적대하고 따라서 어떠한 현실적 유인도 자체 내에서 생산해낼 수 없는 운동 조직이 그러한 구심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운동, 대의, 당위 등의 좋은 말들은 잠시 접어두자. 나는 지금 가능한 한 현실적으로생각하고 싶다. L에 비해 대학시절의 어떤모임은 상대적으로 진공상태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사회 전체와 대학이 신자유주의화의 과정에 접어들었던 2000년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현실을 대할 때 무한정 여유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예는 가능했다. 당시의 성원들은 그 유예를 통해 얻어진 행복한 진공 속에서 자유로웠고 현실을 핑계 삼지 않고 서로를 마음껏 변화시켰다.

 

수년간의 짧은 시간 동안 매우 압축적이고 집중적으로 만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시간의 측면에서도 어떤모임은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영구적 상호변화라는 과제가 그 자체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모임이 유지되는 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시간간격 없이 서로를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며 변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조건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달콤한 성공의 느낌은 잠재적으로는 인류 전체를, 즉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나와 더불어 바꿀 수 있다는 환상적 판단을 위한 자리까지도 시나브로 만들어낼 정도였던 것 같다. L은 그러한 접촉의 시간적 압축성을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시간을 이겨내야 하는 변화라는 과제의 지난함을 어떠한 환상도 없이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조건 위에 서있다.

  

특정한 모임 내에서의 사람의 변화라는 과제 앞에 놓여있는 어려움에 대한 위와 같은 서술이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과제의 달성은 조건의 조직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성공 사례의 분석을 통해 성공으로 향하는 조건을 조직하자는 것인가?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지는 답은 사람의 변화를 실체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도모하는 일은 온갖 해악적 조건들로부터의 보호가 실행되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외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도모되는 사람의 변화라는 조직의 목표는 소모와 피로를 초래하고 그 결과 전반적인 비-행복을 낳는다는 점에서, 사람의 변화는 사람의 변화 그 자체를 목표로 할 때 오히려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역설이 성립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사람의 변화를 주된 목표로 삼는 조직은 사람을 하나의 실체, 즉 직접적으로 주어져있는 것으로 여기는 한, 활동과 고민이 협소하고 조야한 직접성에 떨어지는 위험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변화라는 과제는 운동에서, 운동조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운동이 의미하는 세계의 변화가 곧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운동은 결코 사람의 변화에 무관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때 사람은 옆에서 살을 부대끼고 살아가는 몇몇의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즉 유로서의 인간이며, ‘변화는 직접적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화(感化)가 아니라 인간을 관통하는 사회적 관계선들의 변화를 통해 유적 인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유적 변화이다. 면대면의 관계에서 감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람의 변화는 소망스럽고 덕스러운 일이며 운동과 대립적일 이유가 없는 일이지만, 그 자체가 운동은 아니다. 아니, 운동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직접적인 조직의 목표가 될 경우 운동은 수렁에 빠지는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 한 위대한 소설 속 질문을 상기시키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도 바꾸지 못하면서 세계를 바꾸려하냐는 의문 내지 비아냥은 얼핏 정당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여기서 사태를 적중시키지 못한다. 정동이 감정이 아니고, 사랑이 정서적 친밀감이 아니듯, 우리가 생각해야할 인간의 변화는 직접적 감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운동조직의 제1의 과제는 구성원들 상호간의 직접적 영향관계 및 개입을 통한 변화, 즉 감화가 아니라 세계 변화에의 참여이다. 우리는 그러한 참여를 이른바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서 활동으로라는 테제로 표현될 수 있을 포인트의 이동이 그리는 바람직한 조직화 양상은, 일단 사람이 모여서 활동을 구상하고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통해 사람이 모이는 모습이다. L의 창립과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처음부터 모임과 활동 간의 괴리를 안고 출발했으며, 그 괴리를 극복하려 애쓰는 과정이 사람의 변화라는 지난한 과제 성취의 끊임없는 좌절과 함께 구성원들 사이에 지속적인 피로와 좌절감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이는 L의 초기 구성동력이 구체적 활동 내용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에서 나온 사태의 귀결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반면 활동을 동력으로 이루어지는 만남 혹은 모임은 그러한 괴리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봉쇄한다. 활동을 통한 조직화가 갖는 힘과 관련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지점 가운데 하나는, 활동 그 자체가 실은 가장 강력한 인간 변화의 힘이자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결코 균일한 단일체가 아니다. 하나의 개인은 실은 여럿이라 해도 좋다. 한 사람의 인간 속에는 무수히 많은 선들, 억압적 선들과 혁명적 선들이 한데 뒤엉켜 싸우며 관통하고 있다. 직접적 접촉을 통한 사람의 변화가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낳는 것은 저 선들의 계통없는 뒤엉킴을 해결할 만한 일종의 거리내지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 활동은 사람을 구속하고 있는 자기억압적 선들에 대해 일종의 해독제 역할을 하며, 혁명적이고 해방적인 선들을 강화/고양시킨다. 그런 맥락에서 같은 인간들 간의 접촉이라 하더라도 활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접촉은 말 그대로 직접적인 접촉에 비해 불필요한 감정적 찌꺼기의 침전을 예방할 더 큰 가능성을 갖는다. 활동 속에서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힘과 힘이 만난다.

 

그런데, 사람보다 활동, 혹은 사람에서 활동으로라는 테제는 좌파 역사의 고질적 문제, 즉 이념, 조직, 운동에 의한 인간 소외라는 비극적 역설을 다시 뒷문으로 불러들이는 것 아닌가? 물론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은 이념, 조직, 운동의 추상성에 의해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소외되어 있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외된다.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 친구에게로 돌아가는 것, 우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기, 친구, 우리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귀환은 결코 소외를 막아주지 못하며 오히려 스스로 팠기 때문에 더욱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으로 우리를 빠뜨릴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는 운동을 통한 소외라는 비극적 역설을 예방해줄 강력한 활동의 수평성, 개방성, 연결성을 위한 조건과 사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다. 당장 촛불을 통해 만들어진 조직들, 두리반과 마리, 희망버스 등을 떠올릴 수 있으며 시야를 세계 전체로 확대하면 그 사례는 더욱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일단 모이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창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여야지만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활동의 창안을 오히려 가로막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곧장 공통적인 것과 등치될 수 없듯이, ‘가 곧 개별적인 것은 아니다. ‘의 안에는 억압, 싸움, 연대 등등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선들이 교차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나로부터 시작되는 활동이 나만의활동인 것은 아니다. 활동을 창안하자.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말고, 활동을 창안하고, 활동 속에서 다시 만나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