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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s

노동이 넘어서야 할 ‘이분법’은 무엇인가

<문학3> 4호(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1933521) 기고문



 

오늘날 노동과 관련하여, 혹은 노동이 넘어서야 할 ‘이분법’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이분법’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노동의 비정규성은 그 극단에 이르면 노동의 상실의 정규성, 즉 실업과 같은 것이라는 점에서, 저 ‘이분법’은 취업과 실업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이분법이라는 말을 인용부호 안에 넣은 것은 그것이 무슨 인식이나 사고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현실로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규성과 비정규성을 사회적으로 할당받은 노동자들 간의 이른바 노노(勞勞)갈등은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강박의 결과가 아니라 이분법적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문제는 사고의 비판에 의해 해결되기보다는 현실 자체의 비판을 통해 해소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분법이 ‘현실 자체의 비판’이 걸린 문제라는 것은 물론 대단한 진단이 아니다. 정부관료에서 노동운동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심으로든 아니든) 정규적 노동과 비정규적 노동의 나뉨을 문제로 인식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해결 내지 완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이분법의 극복에는 논리적으로 두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두 항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함으로써 다른 하나가 사라지는 경우가 한가지이고, 이분법의 원리적 근거 자체가 무너짐으로써 두 항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 다른 한가지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극복의 노력은 첫번째 길을 택하고 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노동의 비정규성 혹은 불안정성이요, 보존되어야 하는 것은 정규적이고 안정적인 노동이다. 요컨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취업과 실업 간의 이분법의 바람직한 극복은 후자의 전자로의 해소라는 것이다.[각주:1] 문제는 두가지다. 첫째, 이것이 가능한가? 둘째, 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바랄 만한 것인가?

 

노동의 불안정성은 어디서 오는가. 우선 용어를 명확히 하자. 지금 논의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노동은 자본주의적 노동, 즉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의 불안정화는 임금노동과 사회 사이의 연결이 느슨해진 것을 표현한다. 오늘날 사회의 생산과 재생산, 유지와 운영에서 임금과 교환되는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이 차지하는 몫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노동자 개개인의 생산력과 무관하지 않되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 그 자체의 생산적 능력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 시절 노동이 직면한 불안정성은 인류의 생산력이 고도화된 결과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는 전혀 불행한 일이 아니고 오히려 커다란 기회이자 축복일 수 있다.

맑스는 흔히 ‘기계에 관한 단상’으로 알려져 있는 연구노트 「고정 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서 이와 같은 단계의 자본주의를 예견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하에서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생산사용 가치의 창출의 규정적인 원리로서의 직접적인 노동”은 “양적으로 보다 작은 비율로 낮아질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과학적 노동, 자연과학의 기술적 응용에 비해서 부차적인 계기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총생산의 사회적 구조로부터 유래하는 (…) 일반적 생산력에 〔비해서〕도 부차적인 계기로 나타난다.”[각주:2] 그리하여 고도로 발전된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부의 커다란 지주(支柱)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수행하는 직접적인 노동도 아니고, 그가 노동하는 시간도 아니며, 그 자신의 일반적인 생산력의 점취, 그의 자연 이해, 사회적 신체로서의 그의 현존에 의한 자연 지배한마디로 말해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 현재의 부가 기초하고 있는 타인 노동시간의 절도는 새롭게 발전된 (…) 이 기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으로 나타난다.”(380~81면) 여기서 타인 노동 시간의 절도의 ‘합법적’ 형식이 임금과 노동의 교환, 다시 말해 임금노동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형태의 부의 기초인 이 임금노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점점 더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노동시간을 척도로 하여 수행되는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이 아니라 그러한 척도를 벗어나는 ‘사회적 개인’, 곧 개인 안에 들어와 있는 사회, 사회로서의 개인, 요컨대 사회 그 자체의 ‘일반적 생산력’이 ‘생산과 부의 지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과 노동이 교환되는 자리, 즉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현상, 일국 차원에서건 전지구적 차원에서건 어떤 정책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역사적 경향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이것은 실업의 점차적인 일반화가 필연이라는 말과 같다. 우울한 결론인가? 노동하지 않음이 불행이라는 것이 불변의 진실인 한에서만 그렇다. 일정한 존재나 현상의 사회적 가치와 의미는 그것이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각주:3] 마찬가지로 노동하지 않음은 노동하지 않음일 뿐이다. 특정한 배치와 사회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불행이자 저주가 된다. 이 특정한 배치와 사회관계란 무엇인가? 노동과 소득의 연결이 철의 법칙으로 관철되는 사회, 곧 임금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사회적 관계이다.[각주:4] 인공지능의 발전이 많은 이들에게 인간의 일자리에 대한 위협과 그에 따른 공포로 경험되고 있는 현실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생산과 노동이 조직되는 특정한 방식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임금노동을, 노동과 소득의 연결을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상력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사회적 범주는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도 그대로 성립하는 것으로 사회적 범주를 실체화할 때 온갖 혼란이 시작된다. 노동은 인간 활력의 외적 발현으로서 그 자체로는 소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노동은 특정한 사회적 관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하에서만 ‘임금’노동이 된다.[각주:5]

소득의 관점에서 노동과의 연결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본래 유대교의 노동윤리인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임금노동을 자신의 존재조건으로 삼는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하에서 최고의 적합성을 얻는다. 그러나 인류는 오랫동안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보다 결코 적지 않은 몫의 소득을 커먼즈(commons)로부터 얻어 생활해왔다.[각주:6] 자본주의의 탄생은,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노동력 이외의 생계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계급, 곧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반드시 필요로 했고, 이는 그러한 노동 외 소득원천의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현재와 다른 사회적·생산적 관계하에서라면 ‘실업’이 가능성이자 기회로 경험될 수 있다. 사실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으로 제한된 지평을 넘어서 인류 역사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생산력의 발전은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 즉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를 의미하고, 이는 다시 인간이 자신의 활력을 성장시키고 표현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의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역사적 사명과 경향은 이처럼 인간의 시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 즉 “자본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사회적 가처분 시간을 위한 수단들을 창출하여, 전체 사회를 위한 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감축하고 그리하여 모두의 시간을 그들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해방시키는 데 있어서 도구적이다.”(384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창출된 가처분 시간을 자신의 협소한 한계 안에 가두려는 것, 말 그대로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잉여노동을 위한 시간으로 전환하려는 것이 자본의 또다른 경향이며, 이러한 경향과 앞서의 경향 사이의 갈등이 자본을 살아 있는 모순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본은 이 모순 속에서 자신의 생산관계의 기초를 “공중으로 폭파시켜버리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생산을 지배하는 형태로서의 자기 자신의 해체에 종사한다”.(382면; 374면)[각주:7]

그러나 ‘해체’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적어도 완결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아직 자본주의를 살고 있다. 맑스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소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고정된, 사물화된 노동인바, 이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현실화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이러한 현실화는 국민경제학적 상태에서는 노동자의 탈현실화로서,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서, 전유는 소외로서, 외화로서 나타난다.”[각주:8]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즉 ‘실업’이 나타나는 방식도 이와 같다.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는 노동의 소외일 뿐 아니라 노동으로부터 놓여남의 소외이기도 하다.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귀결이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라 족쇄로 경험된다. 오늘날의 ‘국민경제학적 상태’에서 임금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임금노동 관계로의 더욱 철저한 예속으로 나타난다. 전면적 해방(실업)과 부분적 해방(비정규직)의 담지자들이 해방의 취소를 위해, 임금노동 관계로의 완전한 복귀를 위해 목을 매야 하고, 이러한 상황이 노동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노동자 간 경쟁의 격화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임금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사회적 죽음이 아니라 자유, 기회, 가능성으로, 말 그대로 해방으로 경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적 관계와 조건이 필요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통의 짐이 오롯이 개인에게 지워질 수밖에 없는 개별적 실업이 아니라) 임금노동으로부터의 일반화된, 보편적 해방은 그 자체로 다른 사회적 관계의 탄생에 다름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 죽음으로 경험되지 않는, 임금노동으로부터의 보편적 해방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혹은 적어도 만들어질 수 있는가? 노동하지 않음의 소외는 노동의 소외의 필연적 귀결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해소는 후자의 극복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노동의 소외의 본질적인 극복은 아니지만, 노동과 소득의 연결을 상대화하여 노동의 선택과 실행에 있어서 자유를 확장함으로써 저 극복을 위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대안은 커먼즈 운동에 의해 마련되고 있다. 커먼즈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를 양분해왔던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논리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지배하에 소외된 형태로 나타나는 공통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 사적인 것의 일원적 논리다를 넘어서 삶과 사회를 생산·조직·운영하는 대안적 원리이자 실천이다. 네그리(Antonio Negri)와 하트(Michael Hardt)는 현대사회와 생산에서 커먼즈가 갖는 의미를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론적으로 탐구해왔으며, 현실적 차원에서는 커먼즈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다양한 층위와 분야에서 무수히 많은 실험들이 기획·시도되고 있다. 커먼즈는 이론적으로 구상된 완결적 논리가 아니라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만들어지고 있는 패러다임이므로 일치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공통자원(common-pool resources), 커머너(commoner)들의 커머닝(commoning)과 그들의 공통체(commonwealth), 커머너들 사이의 규약 등이 필수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요소를 보든 핵심은 공통적인 것에 있으므로, 커먼즈는 타인 노동의 절도에 기초한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고, 커먼즈 내에서의 노동(정확히는 활동)은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이 될 수 없다.[각주:9]

 

그래서, 노동이 넘어서야 할 ‘이분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이분법도, 취업과 실업 사이의 이분법도 아니다. 문제는 임금노동과 자유로운 활동 사이의 대립, 다시 말해 임금노동 관계 자체이다.[각주:10] 노동과 활동의 대립,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과 자신의 욕구 및 자유로운 개성을 표현하는 일 사이의 대립이 지양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저 이분법들은 성립 근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이분법의 근저에는 노동과 자본의 ‘이분법’, 즉 대립이 있다. 노동자들 간의 갈등은 노동과 자본 간 대립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늘 그렇듯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양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분법’은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 자체를 구성하는 이 대립, 이 이분법이다. 그리고 대립의 극복은 노동의 승리가 아니라 현재와 같은 형태의 노동과 자본 양자 모두의 지양이어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임금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1]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 속에 존립하는 노동, 즉 자본과 대립하는 노동이기를 그친 노동은 또한 임금과 교환되는 노동, 소외된 노동, 소외된 활동이기를 그칠 것이다.

앙드레 고르(André Gorz)는 40여년 전에 “우리는 덜 노동하면서도 더 많이 잘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생산으로도 모든 필요를 더 잘 충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각주:12]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노동과 생산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한편에는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욕구와 자유가 아니라 이윤을 위해서 생산하는 사회적 구성체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점점 더 많이 주어지고 있는 가처분 시간을 온전한 자유의 시간을 만들 것인가 소득과 분리된 고통의 시간으로 경험할 것인가는 인류의 활력의 낭비를 통해 유지되고 있는 현재와 같은 어리석은 사회를 끝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너무 근본적이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 많은 이들에게 인류가 통과해온 역사적 단계들은 그것이 잠재적 경향으로 존재하는 한, 다시 말해 그들이 그 위에 실제로 서게 되기 전까지는 ‘비현실’일 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경향으로, 잠재적 힘으로,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각주:13]로 이미 존재하는 저 ‘비현실’적 사회에서는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표로 해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가처분 시간이 증가”할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진정한 부는 모든 개인의 발전된 생산적 능력”이며 “부의 척도는 더이상 노동시간이 아니라 가처분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384면)

활동과 소득이 연결되지 않는 사회는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윤리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능력이나 활동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정의로 되어 있다. 모든 정의는 누군가의 정의이니, 이것은 노예의 정의다. 능력과 활동이 제 발로 서서 그 자체로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지 못하고 보상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지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윤리학』 5부 정리42)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에게 능력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음 그 자체로 기쁜 것이고, 활동은 무언가를 한다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활동에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낯설어하거나 심지어 모욕으로 여길 것이며, 오직 그것들의 펼쳐짐을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맑스의 이 유명한 구호는 더이상 구호로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각주:14]

 

남는 질문들_

글에 따르면 기술의 발전은 계속해서 실업이 확대되는 요인인 동시에 덜 ‘노동’하고 더 ‘활동’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기술이 발전한다고 저절로 새로운 노동의 관점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고 지금도 기술은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노동문제에 있어서 기술발전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덜 ‘노동’하고 더 ‘활동’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의 창출에 기여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생산력 발전의 부분적인 계기일 뿐이다. 맑스의 관점에서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 기술의 발전 못지않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유대와 교류의 발전, 맑스 특유의 표현으로 하자면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 때문에 ‘물질적 조건’이라는 말의 ‘물질’은 흔히 양적으로 측정되곤 하는 물질로서의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와 힘을 포함하는 것으로 읽을 때 더 적합하게 이해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시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잠재력과 조건을 제공한다. 그러나 새로운 ‘노동의’ 관점뿐 아니라 그 어떠한 새로운 관점도 기술의 발전을 통해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하물며 ‘관점’이 아닌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기술의 발전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적 존재의 성장,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 이전과 다른 사회적 관계의 성립에 불가결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도 ‘저절로’ 무언가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낡은 관계와 조건은 새로운 관계와 조건을 자신의 협소한 한계 안에 가두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이고, 새로운 것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싸움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회·활동·삶의 해방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들은 ‘소망’일 뿐이다. 결코 ‘저절로’ 해결되지 않을, 이 싸움에 걸려 있는 문제들을 ‘정치’라는 말로 요약해도 좋겠다.

 

노동 문제에서는 이분법적 접근이 오히려 분석에 도움을 주는 것도 같다. 다만 노동과 자본의 이분법이 해소된 이후에도 ‘일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쟁점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하다못해 커먼즈를 통해 생계를 해결하는 것도 전근대의 예를 생각해보면 고된 노동일 수 있지 않을까?

 

질문의 취지는 자본주의적 노동, 즉 임금노동이 사라진 후에도 ‘고된 노동’, 누구도 원치 않더라도 사회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노동, 다시 말해 필요노동과 관련된 문제는 남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에 걸려 있는 문제는, 필요노동시간과 나머지 시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자본은 잉여노동을 정립하기 위해서만 필요노동을 정립한다. 그러므로 임금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늘 삶에 필요한 것 이상의 노동, 즉 잉여노동과 더불어 필요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노동이 사라진다는 것은 필요노동이 잉여노동의 속박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자유로운 시간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역사적 수명을 다한다 해도, 즉 필요노동시간과 나머지 시간의 관계가 지금과 달라진다 해도 필요노동시간이 0이 될 수 없는 한, 필요노동의 사회적 조직화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성, 생태 등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과 관련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자본의 폐지가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결을 가져다주리라는 생각은 안이하다. 그러나 잉여노동이라는 짐을 떨쳐버리고 사회의 생산력을 온전히 가처분 시간의 확보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 이루어질 필요노동시간의 최소화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양적 변화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노동 자체의 성격까지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하루 8시간 청소는 ‘고된 노동’일 수 있지만, 생활공간을 쾌적하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하루 30분의 청소는 8시간 청소의 1/16의 고됨을 포함하는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에 활력을 주는 활동일 수 있다. 노동에 있어서 양의 문제는 단순히 양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 것이다. 자유로운 활동과 고된 노동의 구분에는 양이 아니라 맥락과 관계의 문제도 있다. 임금노동으로 (혹은 소외된 노동이면서 임금도 받지 못하는 ‘그림자 노동’으로) 수행되는 요리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식사의 기쁨을 위한 요리는 같은 요리이지만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러므로 필요노동의 사회적 조직화라는 문제는 노동시간의 양적 최소화뿐 아니라 노동과 삶의 내재적 관계의 회복과도 관련되어 있다. 잉여노동에의 종속을 떨쳐버린 필요노동은 이 문제에 있어서 확실히 지금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글에서 관련 블로그를 소개했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지금 한국의 커먼즈 실험 사례를 한가지 소개해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커먼즈 패러다임의 성장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구의 수준에서는 제주대학교 SSK연구단의 공동자원 연구 총서가 눈에 띈다. 공유도시에 대한 서울시의 관심도 커먼즈 패러다임과의 관련 속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커먼즈 실험이 커먼즈나 공유라는 말이 발화되고 의식되는 곳에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커먼즈는 이념도, 특정한 운동 영역이나 주제도 아니다. 애초에 커먼즈라는 패러다임의 부상 자체가 생태, 도시, 인터넷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던 활동들이 공동의 문제의식과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만나는 가운데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커먼즈는 아래로부터, 다중심적으로 만들어진 패러다임이다. 생태, 지역 등의 문제를 다루는 한국의 운동들 역시 커먼즈나 공유라는 말의 ‘유행’ 이전에 이미 잠재적으로 커먼즈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부터 이루어져야 할 커먼즈 패러다임의 의식적인 공부와 활용은 그러한 잠재적 요소들의 증식과 현실화를 통해 개별 운동의 성장,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운동들의 연결에 있어서 이전과 다른 가능성을 가져다줄 것이다.

 

오늘날 구글 등 대형 정보 테크놀로지 자본은 빅데이터라는 커먼즈를 발 빠르게 점유해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새로운 커먼즈가 개발되었을 때 기존의 자본 권력이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적 관계 형성을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본문에서 이야기했듯이, 사회적 범주는 오직 사회적으로만 결정된다. 커먼즈 역시 마찬가지다. 빅데이터가 커먼즈가 될 것인지 자본의 자원이 될 것인지는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다. 앞서 커먼즈는 공통자원(common-pool resources)뿐 아니라 커머너(commoner)들의 커머닝(commoning)과 그들의 공통체(commonwealth) 및 규약을 필수 구성요소로 한다고 했다. 자원을 공통자원으로, 집단을 공통체로 만드는 것은 주체(커머너)의 실천(커머닝)이다. 커머닝 없이는 커먼즈도 없다. 그러므로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이런저런 자원과 기술이 해방에 기여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강화할 위험이 있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러한 자원과 기술을 어떻게 커먼즈로 만들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맑스의 말을 빌리면,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떼어내졌을 때 그것은 자본이 아닌데, 이는 마치 금이 그 자체로는 화폐가 아니거나 혹은 설탕이 설탕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임금노동과 자본』)

 


  1. 물론 현실적인 목표는 후자의 완전한 해소가 아니라 최소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비정규성의 완전한 제거를, 현실적 목표를 인도하는 이념적 목표로 설정하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I』, 김호균 옮김, 백의 2000, 374면. 앞으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시 인용문 끝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한다.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을 포함한 모든 인용에서 필요한 경우 번역을 수정했다. [본문으로]
  3. 칼 맑스 「임금노동과 자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최인호 외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1, 555면. [본문으로]
  4. 물론 이 ‘철의 법칙’은 사회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게만 철의 법칙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을 가능케 하는 기초임에는 변함이 없다. [본문으로]
  5. 다른 시대에도 임금노동이 존재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임금노동이라는 등식이 성립한 것은 오직 자본의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이는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화폐와 자본주의적 화폐가 ‘화폐’라는 이름만 공유하는 사정과 같은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단지 같은 명칭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시대의 ‘임금노동’을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임금노동과 혼동하는 일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의 ‘일’을 대표하는 임금노동은 중세 내내 비참함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 먹고살 방법이 임금노동밖에 없다는 말은 곧 몰락했거나 이탈했다는 뜻이었다. 임금노동자는 절름발이, 유배자, 순례자, 미치광이, 탁발승, 떠돌이, 노숙자 등과 함께 중세의 거대한 빈민층에 포함될 만큼 가엾은 존재로 여겨졌다. 임금노동에 의존해 산다는 것은 자신이 봉사할 수 있는 가정이 없다는 뜻이었다. 구걸할 권리는 어엿이 규정되어 있는 사항이었지만 일할 권리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노승영 옮김, 사월의책 2015, 181~82면) [본문으로]
  6.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12 참조. [본문으로]
  7. “자본 자신은 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을 부의 유일한 척도이자 원천으로 정립함으로써 진행되는 모순이다. (…) 요컨대 자본은 한 측면에서 보면 부의 창출을 그것에 이용된 노동시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해 사회적 결합 및 사회적 교류뿐만 아니라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을 소생시킨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본은 이렇게 창출된 방대한 사회적 힘들을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고자 하며, 이미 창출된 가치를 가치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한계 안에 이 사회적 힘들을 묶어두고자 한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양자는 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상이한 측면들—이 자본에게는 수단으로만 나타나며, 자본이 그것의 협소한 기초 위에서 생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들은 이 기초를 공중으로 폭파시켜버리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이다.”(381~82면) [본문으로]
  8. 칼 맑스 『경제학-철학 수고』, 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2006, 85면. [본문으로]
  9. 지면의 제약 때문에 이 글에서는 커먼즈를 충분히 이야기하기 어렵다. 네그리와 하트의 개념 ‘공통적인 것’에 대해서는 『공통체』(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를, 커먼즈 패러다임과 운동에 대한 소개로는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의 『공유인으로 사고하라』(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커먼즈 실험들에 대해서는 <百手의 블로그>(minamjah.tistory.com)를 참고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10. “노동자의 활동은 그의 자기 활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하며, 그 자신의 상실이다.” “소외된 노동은 자기 활동,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 생활을 그의 육체적 실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경제학-철학 수고』 90면, 95면) “임금노동 제도는 노예제도이며, 게다가 노동자가 수령하는 지불금이 좋건 나쁘건 간에 사회적 노동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더욱더 가혹해지는 노예제도이다.”(칼 맑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 최인호 외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6, 382면) [본문으로]
  11. 『경제학-철학 수고』 110면. [본문으로]
  12.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2011, 228면 [본문으로]
  13. 『경제학-철학 수고』 128면. [본문으로]
  14. 「고타 강령 초안 비판」 377면. 윤리는 물질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활동과 보상의 분리는 활동에 대한 보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구성된 사회에서 성립 가능한 윤리가 아니다. ‘열정페이’의 논리는 필자가 주장하는 윤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