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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s

칸트 철학에서 자기의식의 문제

   

근대라는 역사적 시기를 특징짓는 표지는 한 가지가 아니겠으나, 이른바 개인의 탄생을 그 주요한 표지들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원상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음을 뜻하는 원자atom와 동일한 유래를 갖는 개인은 근대의 정치와 법에서 각종 권리와 의무의 기초단위로 여겨지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동등한 주체들 간의 계약과 교환을 근본원리로 하는 근대 경제의 기본적 요소이기도 했다. 철학 역시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운동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거꾸로 그것에 개입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왔는데, 그러한 근대적 철학사의 여명을 알리는 이정표는 뭐니 뭐니 해도 코기토cogito, 나는 사고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언명일 것이다. ‘나는 사고한다로 최초로 표현된 철학적 자기의식에서 이루어진 사고함의 결합이 그 후의 철학사에 끼친 영향은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기본단위가 우리가 아니라 가 된 것, 즉 개인이 근대의 근본단위가 된 것은 (적어도 철학의 영역에서는) 인간의 가장 주된 관심사가 인식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한다가 제1의 동사일 때 그것에 가장 적합한 주어인 가 철학의 중심이자 시작점이 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사고라는 활동이 cogitare라는 부정형이나 cogitat라는 비인칭이 아닌 cogito라는 1인칭에 의해 규정된 순간부터 근대 인식론, 더 넓게는 철학 자체에서 의 문제는 회피할 수 없는 근본문제가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서술에서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지만 코기토와 함께 시작된 데카르트 철학의 새로움은 무엇보다 세계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로, 세계 자체로 나아가거나 세계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보장해줄 절대자를 바라보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눈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렸다는 점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유와 인식의 확실성을 담보해줄 수 있는 것은 사유 그 자체의 전제, 즉 자기 자신을 회의하고 탐구하는 길 뿐이라는 것이 데카르트 철학의 근저에 있는 문제의식이었다. 이제 인식을 탐구한다는 것은 혹은 나는 사고한다는 자기의식을 탐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었으며 이 자기의식의 문제는 독일로 건너가 독일관념론의 씨앗이자 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독일관념론의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를 중심적 문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라고 말하는 데 그칠 수는 없다. 양자의 차이는 이미 독일관념론의 시작점인 칸트에게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식의 지향적 성격에 무관심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대상의식과 자기의식의 날카로운 대립 가운데 인식을 근본적으로 자기의식의 경계 안에 가둠으로써 그것의 확실성을 담보하려 했으며, 결과적으로 의식의 자기완결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를 세우게 되었다. 이에 반해 칸트에게 제1의 관심사는 어떻게 대상인식이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칸트에게 의식은 본질적으로 객관지향적인 것이며, ‘수용성이나 촉발과 같은 칸트 철학의 특징적인 표현들은 바로 그와 같은 객관지향성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뿐만 아니라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가 취하는 약식 추론형태도 칸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사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그 형식상 사고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라는 대전제를 생략한 약식 3단논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칸트가 보기에 사고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라는 대전제의 경험적, 객관적 타당성은 검증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자기의식의 확실성은 데카르트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칸트는 특히 순수이성비판의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에 관한 장에서 자신만의 자기의식 이론을 전개하게 되는데, 본고의 목적은 그러한 칸트의 자기의식 이론의 내용과 구조를 살피는 것이다. 논의과정에서 특히 순수이성비판초판과 재판이 담고 있는 자기의식 논의 사이에 상당한 변화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그러한 변화는 초판에서 자기의식에 주어졌던 상당한 정도의 제약이 점차 사라지고 자기의식이 인식능력과 원천 전체에 대해 보다 큰 포괄력과 장악력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음이 논해질 것이다
 

초판의 자기의식 논의 

칸트의 인식론이 데카르트의 그것과 달리 대상 인식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은 순수지성개념, 즉 범주와 그것의 연역을 다루는 부분을 담고 있는 초월적 논리학 앞에 직관의 형식을 다루는 초월적 감성학이 배치되어 있는 순수이성비판의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간의 인식작용은 우선적으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초월적 감성 형식을 통해 인식의 자료를 받아들이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초월적 감성학의 골자이다. 그런데 인식의 질료로서의 잡다를 받아들이는 창구인 감성은 수용성, 받아들이기만 함을 특징으로 하며, 따라서 직관에 주어진 잡다는 감성과 구분되는 인식원천의 개입 없이는 정리되지 않고 무규정적인,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잡다를 이룰 뿐이다. 감성만으로, 직관만으로, 수용성만으로, 잡다만으로는 아직 인식이 아니며 이들은 오직 자발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인식으로 성립될 수 있다. 자발성이란 말 그대로 인간 인식능력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과 개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의 내용은 규정되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잡다를 종합하는 것이다. 초판에서 이 종합은 세 개의 겹을 가지는 것으로 논해지는데, 세 가지 종합이란 각각 직관에서 마음의 변양인 표상들을 포착하는 종합, 그것들을 상상에서 재생하는 종합, 그리고 그것들을 개념에서 인지하는 종합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합은 다시 감각, 상상력, 통각이라는 주관의 세 인식원천과 관계한다.

이른바 종합 작용과 관련한 이러한 초판의 논의구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 겹의 종합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세 종합에 관여하는 인식원천들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독립적으로 종합을 수행하는가, 아니면 어떠한 하나의 인식원천이 종합의 궁극적이고 좀 더 근원적인 원천이 되는가이다. 문제는 첫 번째 종합에서부터 발생한다. 첫 번째 종합은 직관에서 이루어진다. 칸트는 잡다에서 직관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그 잡다를 일별하고, 다음에 그것을 총괄함이 필요하다”(A99), 이러한 작용을 포착의 종합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칸트는 이러한 포착의 종합이 없다면 직관은 결코 어떤 잡다도 생기게 할 수 없는 것”(A99)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모호한 점은 이러한 종합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이다. 종합의 힘이 감각 자체에 있다고 하면 감각은, 그러니까 직관은 수용성뿐만 아니라 자발성 또한 갖는다고 말해야 하고, 만약 애초의 논의대로 감각이 수용성만을 가지며 따라서 인식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자발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른 인식원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종합의 힘은 감각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초판 연역 장의 곳곳에서 우리는 인식의 세 원천 중 다른 무엇도 아닌 통각에게 연결, 통일, 종합의 근본적 힘을 부여하는 듯한 서술들을 만날 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러하다.

직관의 모든 資料에 선행하고, 또 그것과의 관계에서만 대상에 대한 일체의 표상이 가능한, 그 의식의 통일[] 없이는 어떠한 인식도 우리 안에서 생길 수 없고, 인식들 상호간의 연결이나 통일도 생길 수 없다. 이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전변 없는 의식을 나는 이제 초월적 통각이라 부르려 한다.(A107)

이 때 초월적 통각이란 자기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근원적이고 필연적인 의식”(A108)이자 자신의 활동의 동일성을 시야에 두고 있는 마음, 요컨대 자기의식이다. 근원적 통각 혹은 순수통각이라고도 불리는 이 자기의식의 본질적 특징은 동일성, 즉 그 하나임인데, 이 의식의 하나임이야말로 종합의 궁극적 근거, 따라서 인식의 필연적 성립근거이다. 모든 경험적 의식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자기의식, ‘에 귀속됨으로써만 종합적 통일을 이루어 하나의 경험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자기의식은 경험적 의식과의 관계맺음에서 초월적 의식으로 작용한다. 이 때 에 대한 의식이 현실적으로 명료하냐 모호하냐는 중요치 않은데, 그 까닭은 자기의식은 모든 경험적 의식과 필연적으로 초월적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할 때 그 필연성은 현실적 필연성이 아니라 일종의 논리적, 가능적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인식의 논리적 형식의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능력으로서의 이 통각과의 관계에 의거한다는 사실이다”.(A118) 연역 장의 과제, 즉 범주들의 권한 다시 말해 객관적 타당성의 증명 또한 근본적으로 통각에 의거한다. 규칙들의 능력인 범주가 현상들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은 자연의 규칙성 때문인데, 모든 현상들의 합법칙성의 초월적 근거는 다름 아닌 초월적 통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서 그 질서와 규칙성을 우리는 스스로 집어넣는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그 질서와 규칙성을, 바꿔 말해 우리 마음의 자연[본성]을 근원적으로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자연 안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A125)

다시 말해, 초월적 통각으로서의 자기의식이 모든 현상의 합법칙성의 궁극적 준거로 자리하지 않는다면, 지성, 곧 규칙들의 능력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규칙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월적 통각은 인식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인식과 경험은 자기의식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인식이 인식일 수 있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직관의 자료, 즉 잡다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여기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식의 세 가지 원천 중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세 번째 항인 상상력이다. 인식의 원천이라는 표현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칸트에게서는 상상력 역시 감성, 통각과 마찬가지로 인식에 초월적인 방식으로 관여한다. 중요한 것은 관여의 방식이다. 감성이 인식의 자료를 마련하고 통각이 잡다한 자료를 하나의 표상으로 통일한다면 상상력은 양자 사이에서 일종의 고리 역할을 한다. 칸트 자신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상상력을 매개로 해서 우리는 한 쪽의 직관의 잡다와 다른 쪽의 순수 통각의 필연적 통일의 조건을 결합한다. 두 끝인 감성과 지성은 상상력의 이 초월적 기능을 매개로 해서 필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A124) 

상상력 역시 일종의 종합 작용을 수행하는데 이는 통각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합과 같은 것이 아니다. 상상력의 종합은 통각에 앞서 모든 인식, 특히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이다.”(A118) “통각에 앞서라는 표현이 함의하는 바는 상상력이 우선 그 자체로는 감성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자체로서의 상상력의 종합은 잡다를 단지 그것이 직관에 현상하는 그대로 결합”(A124)한다. 이러한 의미의 상상력은 아직 직관과 감성의 층위를 벗어나지 못한 상상력이며, ‘생산적종합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생산적 종합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성화되어야 하며, 이 때 지성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초월적 통각과 일정한 관계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상상력은 초월적 통각을 통해서 직관에 통일의 규칙을 부여하고 반대로 초월적 통각은 상상력을 매개로 해서만 직관을 만날 수 있다. 초월적 통각이 지성의 규칙성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이는 결국 감성과 지성은 상상력을 매개로 해서만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며, 이렇게 감성-상상력-지성이라는 세 가지 인식원천의 계열이 완성된다. 순수지성 개념의 연역이 결국 어떻게 순수지성 개념인 범주가 감성의 영역에서 주어진 것들에 적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면, 다름 아닌 상상력이 그러한 연역의 핵심적인 열쇠인 셈이다.

감성과 지성 사이에 이러한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감성과 지성이 그 자체로는 엄격하게 구분되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상대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논의의 주제인 자기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초월적 통각은 그 근원적인 종합의 힘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는 공허하고 형식적인 성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칸트의 코기토, 나는 사고한다사고한다의 목적어가 없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라는 주어와 목적어를 매개해줄 수 있는 상상력의 작용 없이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 초판의 연역 장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이 바로 이 상상력의 역할과 위상이다. 상상력이 감성과 지성 사이에서 점하고 있는 모호한 위치로 인해 감성/지성, 수용성/자발성이라는 순수이성비판의 이원론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상상력은 감성적인가 지성적인가? 상상력의 본질은 수용성인가 자발성인가? 이러한 문제로 인해 초판의 발간 이후 연역 부분의 모호함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재판에서 해당 부분을 거의 다시 쓰게 된다. 우리의 관심은 재판에서 상상력과 관련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자기의식, 즉 초월적 통각의 역할과 위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다.

 

재판의 자기의식 논의 

재판에서 칸트는 통각의 원칙을 초월철학이 매여 있어야 하는 최고 지점”(B134)이자 전 인간 인식에서 최상의 원칙”(B135)으로 단언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식을 자신의 인식론의 핵심에 위치하는 가장 근원적 원리로 인정한다. 이러한 강도의 단언은 초판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부분적인 표현만으로 초판과 재판 사이에 칸트가 자기의식에 보다 근원적이고 확장적인 역할과 지위를 부여하는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그것은 이후의 논의에서 입증되어야 할 문제이다. 우선 초판에서 문제가 되었던 상상력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초판에서 문제가 되었던 상상력의 모호한 지위와 역할이 재판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다. 상상력은 여전히 감성과 지성 사이에서 흔들린다. 요컨대 초판과 마찬가지로 재판에서도 감성적 직관의 잡다를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이고, 이 상상력은 지성적 종합의 통일 작용에서는 지성에 의존하며, 포착의 잡다의 면에서는 감성에 의존한다.”(B164) 그러나 초판에서부터 계속 유지되어 온 것처럼 보이는 감성-상상력-지성의 이 3항구도는 감성과 지성 사이의 균형 내지는 대칭 상태가 무너짐과 동시에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변화하는 것은 초판에서 세 겹으로 논의되었던 각 층위의 종합들 간의 관계인데, 이제 명백히 최고 수준의 규정성을 띠는 것은 통각이 수행하는 종합의 역할이다. 즉 세 겹의 종합 간의 관계가 분명치 않았던 초판과 달리 재판에서 칸트는 경험적인 것인 포착의 종합이 지성적인 그리고 전적으로 선험적인 범주에 함유돼 있는 통각의 종합을 필연적으로 따라야만 한다”(B162)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러한 종합들 간의 관계에서 앞서 살펴본 통각 원칙의 최고성에 대한 인정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통각의 근원적 성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감성의 영역에 규정력을 행사하는 데까지, 즉 직관의 형식을 자신의 아래에 두는 데까지 나아간다.

시간에서 직관의 순수 형식은 주어지는 잡다를 함유하는 직관 일반으로서 의식의 근원적 통일에 종속하는데, 그것은 단적으로 직관의 잡다가 나는 사고한다는 일자와 필연적으로 관계맺음으로써,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경험적인 종합의 기초에 놓여 있는 지성의 순수 종합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B140/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통각의 자발성은 극대화되어 직관의 형식까지 규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 통각의 능력과 역할, 즉 자발성의 극대화라는 맥락에서 칸트는 초판에서 이루어진 상상력과 관련된 논의에 제기된 불만과 의문들을 의식한 듯,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저기서 상상력의 이름으로든 여기서 지성의 이름으로든 직관의 잡다를 결합시키는 자발성은 동일한 것이다.(B162)

형식적으로는 감성과 지성 사이에 상상력이 위치하는 3항구도가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성, 즉 자기의식의 자발성이 강화되고 그것에 더욱 근본적인 역할과 지위가 부여됨으로써 내용상 상상력은 자발성을 갖는 것으로, 다시 말해 자기의식의 기능에 포섭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와 함께 감성/지성, 수용성/자발성이라는 순수이성비판을 관통하는 이원론이 제자리를 찾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의식이 점하는 지위의 확장과 강화는 재판에 초판에는 없었던 (그리 길고 자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식 자체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순수이성비판의 전체 구도 속에서 자기의식의 문제는 그 자체로 주제적으로 탐구대상이 된다기보다는 대상의식, 즉 인식이론의 구성상 하나의 형식적인 지위를 부여받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자기의식은 궁극적으로 대상인식과 관련해서만 탐구되고 논의된다. 이는 데카르트와 달리 인식의 객관지향적 성격에 대해 눈감지 않고 오히려 그 지향의 방향과 근거에 안정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칸트의 인식론적 기획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 연역 장의 §25에서는 위와 같은 전체 구도 속에서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의식이 인식과 관련하여 담당하는 역할이 아닌 자기의식 자체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는데, 이는 내용적으로는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의 구분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부분의 서술은 나는 표상 일반의 잡다의 초월적 종합에서, 그러니까 통각의 종합적 근원적 통일에서 나를 의식하는데, 내가 나에게 현상하는 대로도 아니고, 나 자체인 대로도 아니며, 오직 내가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사고한다의 의식, 즉 자기의식은 현상으로서의 나에 대한 의식도 아니고 물 자체로서의 나에 대한 의식도 아니며, 단지 나의 현존재에 대한 의식으로서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사고한다뒤에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덧붙여 일종의 약식 3단추론 형태를 만들어냈던 데카르트와 달리 칸트가 보기에 나는 사고한다는 것에는 이미 의 현존이 포함되어 있으며 cogito ergo sum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있음을 의식한다는 것이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알려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현상 뿐이며, 물 자체는 우리와 관련하여 유효한 인식의 객관일 수 없다는 칸트 인식론의 근본 구도가 자아와 관련해서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의 구분이라는 앞서의 표현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지시하는 것이다. 초판에서보다 재판에서 자기의식에 더 많은 강조점이 주어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 이러한 자기의식 자체에 관한 논의에서 드러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발성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성과 지성, 직관과 통각이라는 칸트 인식론의 기본적인 이원구도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의식이 인식에서 손을 뻗치는 범위가 제 아무리 넓어진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지성은 오직 물 자체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경험, 즉 직관에 주어진 잡다와만 관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의식에 의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터인 그런 지성”, “그것의 표상작용을 통해 동시에 이 표상의 객관들이 실존하게 될 터인 지성”(B138), 요컨대 신적 지성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에게 지성적 직관, 직관적 지성이 가능했다면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은 구분될 필요가 없으며, 구분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의식이 담지하는 역할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되는 이분법적 구도는 자기의식을 둘러싼 순환적 논의구도라는 문제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칸트에 따르면 잡다의 한 의식에서의 결합을 의미하는 종합적 통일은 자기의식의 일관된 동일성에 대한 의식을 의미하는 분석적 통일의 전제가 된다. 다시 말해 직관에 주어지는 잡다의 종합이 없이는 자기의식의 저 일관된 동일성은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B135) 그러나 종합적 통일과 분석적 통일 간의 이러한 관계는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는 역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표상들의 모든 결합은 표상들의 종합에서 의식의 통일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의식의 통일은 표상들이 한 대상과 관계맺음을, 그러니까 표상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따라서 표상들이 인식이 되는 것을 결정하는 바로 그것이며, 그 위에 따라서 지성의 가능성조차도 의거한다.(B137)

자기의식은 잡다의 종합을 전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종합작용은 의식의 통일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순환적 전제 관계는 후에 피히테, 셸링 등에 의해 단일한 원리와 원천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이론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근거가 되고, 그리하여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른바 절대적 관념론의 탄생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지만, 칸트가 인식능력과 원천의 이분법을 유지하고자 하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이른바 유고Opus postumum에서 진행되는 사고는 여기까지가 자기의식과 관련한 칸트 논의의 끝이 아님을 보여준다.

   

맺음말을 대신하여 - 유고의 자기의식 논의와 남은 문제들

최소인에 따르면 유고에서 칸트는 자기의식을 사고하는 나”(Ich denke)가 아닌 직관하는 나”(Ich denke)의 의식으로, 다시 말해 자기직관으로 규정한다. 이는 순수이성비판의 논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인데, 순수이성비판에서 자기의식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사고하는 나로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은 감성의 수용성과 대립하는 자발성의 궁극적 근거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결코 직관일 수 없는, 직관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무언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유고에서 칸트는 통각, 즉 자기의식을 직관으로 규정한다. 

표상능력(facultas repraesentativa)의 첫 번째 활동은 자기 자신에 대한 표상(통각)인데 이를 통해 주관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표상은 직관이며 아직 개념이 아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대상과 직접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직관 뿐이다. 개념은 대상과 직접 관계하지 못하며 대상에 대한 표상을 만날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만드는 자기의식이 자기직관임은 당연하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직관이 대상과 관계한다고 할 때 그 관계의 양상과 방식이다. 자기직관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직관은 순수이성비판에서 그것에 할당되었던 수용성의 굴레를 벗고 적극적인 구성적 작용력을 부여받는다. 여기에서 이미 직관/통각, 수용성/자발성의 이분법은 크게 흔들린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의 형식은 구체적으로 공간과 시간이었다. 위와 같은 유고논의 맥락에서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직관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사물(Dinge)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표상능력의 행위로 이를 통해 주관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만든다.

직관이 수용성의 굴레를 벗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시간과 공간 역시 단순히 잡다를 받아들이는 감성의 형식이기를 그친다. 시간과 공간은 자신과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던 자발성을 부여받아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표상능력의 행위가 된다. 공간과 시간이 여전히 직관의 형식임은 변함없지만, 자기의식이 자기직관인 한에서 직관의 형식은 곧 통각의 형식이 된다. 이전에 시간과 공간 상에 무언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감성이 그 무언가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했지만, 이제 통각의 형식이자 정립하는 능력으로서의 직관에 무언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활동 자체가 그것을 구성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해석자들은 유고가 피히테, 셸링 등으로 대표되는 절대적 관념론의 영향 아래에서 쓰여졌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유고의 내용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비판적 관념론과 완전히 결별하고 절대적 관념론으로 합류했음을 가리키는가의 여부는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본고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의식을 자기직관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칸트의 자기의식 이론의 변천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냐 하는 것이다. 앞서 논의되었던 바와 같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른바 신적 지성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지성은 결코 그와 같은 수 없다고 말한다. 신적 지성이란 자기의식에 의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터인 그런 지성”, 다시 말해 그것의 표상작용을 통해 동시에 이 표상의 객관들이 실존하게 될 터인 지성”(B138)을 말하는 데 인간의 지성은 결코 잡다, 객관, 대상과 그런 방식으로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지성직관으로 대체하기만 하면 유고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기의식, 즉 자기직관의 내용이 된다. 다시 말해 자기직관이란 자기의식에 의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터인 그런 직관이며 그것의 표상작용을 통해 동시에 이 표상의 객관들이 실존하게 될 터인 직관이다. 칸트는 본인이 인간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인식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왜 지성에게 직관의 능력을 부여하는 방향이 아니라 직관에게 지성의 능력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인가? 초판에서 재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변화는 자기의식의 자발성이 확장되고 그것에 더욱 근본적인 규정력이 부여되는 과정으로 나아갔는데, 유고에서는 그 방향이 역전되어 직관이 자기의식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는가? 이상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유고에까지 이르는 칸트 자기의식 이론의 변화를 살핀 끝에 남게 되는 질문들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탐구는 다른 자리를 기약한다.

 

  

참고문헌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90[국역본 : 임마누엘 칸트/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아카넷, 2006]

김정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통각 이론, 인문학 연구3, 1998.

------, 데카르트와 칸트의 “Cogito”, 칸트연구4, 1999.

최소인, 자기의식과 자기직관 - 칸트의 유고(Opus postumum)’을 중심으로, 철학연구40, 1997.

남정우, 칸트의 선험론적 자기의식에 대한 비판적 수용 - 피히테와 셸링의 경우, 철학 사상 문화9, 2010.

김희봉, 의식과 자아의 문제 - 칸트와 후설을 중심으로, 철학51,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