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INT MAGAZINE>에 실린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프란체스코 라파렐리(Francesco Raparelli)의 인터뷰를 번역에 가깝게 정리한 것이다. 번역에 가까운 정리일 뿐 본격적인 번역은 아니므로 인용이 필요할 시에는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문은 다음 주소로 가면 확인할 수 있다.
https://viewpointmag.com/2017/01/18/communism-as-a-continuing-constituent-process/
라파렐리 : 당신은 (마이클 하트와 함께 쓴) 『디오니소스의 노동』(The Labor of Dionysus)에서 현대 생산양식을 설명하면서 “코뮤니즘의 전제조건들”의 중심성을 강조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화(valorization)의 기둥이 된 언어, 정동, 이동성 등을 말하는 것이지요. 2008년에 폭발했던 위기는 이러한 분석을 무효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확인해준 것 같습니다. 동의하시나요?
네그리 :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책은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에서의 집단 연구로 시작되었던, 노동과 노동의 변형에 대한 분석의 요소들을 요약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었는데, 노동계급의 정치적․기술적 구성에서 일어난 심대한 변화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주체화의 과정에서 근본적인 변화들이 나타났습니다. 학생들의 투쟁, 특히 (내가 『세기말(世紀末)』(Fine secolo)에서 정리해보려 했던) 1986년 이후의 투쟁이 당시 노동자들의 투쟁의 많은 측면들을 포섭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IT와 디지털 노동이 이러한 투쟁 중에 점차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1986년에, 그리고 1994-95년 프랑스에서 ― 지식에서 건강, 도시 서비스에서 연금에 이르는 ― 재생산의 지형에서 엄청난 갈등들이 터져 나왔고 메트로폴리스의 중심부에서 표출되었습니다. 2008년 이후의 위기가 이 새로운 맥락과 계속해서 결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이 위기는, 이러한 경우에 늘 그렇듯이, 생산적 주체의 발본적 변화에 대한 통치가능성의 형식을 수립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라파렐리 : 루카치는 레닌에 관한 에세이에서, 혁명의 현실성을 시대의 전체적인 배경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역사 유물론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그러한 현실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코뮤니즘의 전제조건들”이 생산양식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위기와 전쟁의 야만성에 직면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혁명이 유일한 대안일까요?
네그리 : 확실히, 오늘날 금융적 차원에 형성되어 있는 명령의 층위와 산노동(living labor)이 움직이는 일반적인 맥락 간의 모든 매개는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실패와 함께, 오직 혁명적 과정만이 그러한 발본적이고 극복불가능한 모순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미 1980년대부터 능동적 행위들에 대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으로부터 출현하는 주체성의 생산에 대한 분명한 관심을 여러 글들에서 표현해왔습니다.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명령과 저항 사이의 단절, 고정자본의 형태와 산노동이 명령에 직면하여 활성화시키는 부채(負債) 사이의 단절, 즉 변증법과의 단절에 대해 이야기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 확고한 사실이니까요. 더 이상 중심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행동, 조직 수준, 표현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혁명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말은 이 시점에서 진부합니다. 문제는 혁명이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개혁주의적 해결책을 배제한다는 것은 실제적 대항권력의 제도들의 구축에 의해 정의되는 과정적 해법(processural solution)을 어느 때보다 더 강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정적 형식을 넘어서 명심해야 할 다른 요소는 이러한 과정이 전적으로 재생산의 지형 위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생산은 재생산에, 공장은 사회에, 개인은 사회에서 형성되는 집합적인 것에 종속됩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들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습니다. 혁명적 과정의 최종 결과가 아니라 그 조건으로서의 제도들을 말이죠.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혁명의 현실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그것도 앞으로 올 어떤 것의 현실성이 아니라 현재 속의 혁명의 현실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파렐리 : 볼리바르주의(Bolivarism)에서 유럽 좌파의 포퓰리즘에 이르기까지 근래 정세에서 국가라는 주제가 다시 유행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서발턴(subaltern)들에게는 “국가를 장악하기”의 필요성이 운위되지요. 이는 그람시의 강력한 반복입니다. 종종 톨리아티(Togliatti)라는 렌즈를 통해 독해되는 그람시 말이죠. 국가형태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 없이 코뮤니즘적 경험이 있을 수 있을까요? 더욱이 가치화 과정이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말입니다.
네그리 : 국가형태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비판은 넘쳐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즉 매개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국가의 기능 그 자체가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회복되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제 순전히 억압적 기능을 수행할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국가란 기생적인 어떤 것이며, 그러한 한에서 혁명에 관한 사유에서 더 이상 일정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국가 그 자체의 사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이행 국면에서도 우리는 국가가 제공하는 일반적인 도구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것들을 전복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가득 덮고 있는 (억압적) 권력을 조금씩 벗겨 내기 위해서이죠. 따라서 진정한 적은 국가 물신주의입니다. 국가의 헌법에 표현되어 있는 일정한 공적 기능들의 활용을 고려함에 있어서 주권과 국가권력의 자율성을 물신화하고, 그리하여 투쟁들의 자유를 극도로 손상시키는, 더 이상 합리적이지 않은 입장들이 오늘날 존재합니다. 사회적인 것을 변혁하는 유일한 운동인 현실의 운동들보다 전위들을 우위에 두는 물신주의이지요. 국가 물신주의의 배후에 언제나 두 개의 이데올로기 혹은 행동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위가 그 하나이고, 아나키, 직접성, 메시아적 열림이 다른 하나입니다. 정말로 제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라파렐리 : 당신 자신의 코뮤니즘적 투쟁성은 “대중 노동자”들의 놀라운 투쟁으로부터 성장해서 이미 1970년대 후반에 “사회적 노동자”와 마주쳤습니다. 교육, 복지의 확대, 노동거부를 위한 투쟁 등의 산물인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형상 말이죠. 바로 이 형상이 위기의 한가운데서 불안정성의 기호 아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에서 코뮤니즘적 투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네그리 : 그것은 필요의 고통, 결핍의 고통을 욕망하는 “우리”의 구축으로 변형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부과하는 유연성과 이동성 속에서 개인의 고통은 증가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집합적인 것이 현재의 “노동조건”에 확고하게 도입되어야 합니다. 복지와 그 배후에 있는 노동의 형태를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집합적인 것과 전체를 강조할 필요성 그리고 특이성들이 상호 간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코뮤니즘적 정신은 협력적 집합의 재발견에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필요에서 욕망으로 나아가는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물질적인 단계들이 요구됩니다... 나는 오래된 공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유, 제도, 권력 장악 말이지요. 전유는 임금과 소득에 가하는 압력입니다. 다음은 제도를 구축하는 단계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우리”로 인식하고 “우리”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인 단계이며, 결코 직접성이나 순수한 의식 고양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권력 장악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화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제껏 알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권력 장악이란 지속적인 제헌과정(constituent process)을 가동시키는 것이며, 이는 결코 미리 확립되어 있는 제도적 형식들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합의, 응집, 협력의 능력들에 제도들을 언제나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모든 일은 재생산의 지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작년 가을에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일어났던 여성들의 시위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젠더 폭력에 맞선 시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모든 형식들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요소로 이해되는 여성들 ― 오늘날 스스로를 그렇게 드러내고 있죠 ― 에 대한 착취에 맞선 근본적인 선언이었으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움직이는 삶정치적(biopolitical) 지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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