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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안또니오 네그리 / 코뮤니즘 : 그 개념과 실천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1)


Antonio Negri의 "Communism: some thoughts on the concept and practice"를 4회에 걸쳐 번역 · 연재한다. 그 첫번째 부분에서 네그리는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계급투쟁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맑스의 오래된 통찰을 강조한다. 그것은 특히 오늘날의 노동에게는 자본, 교환가치의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뮤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 맞서 우리를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는 '공통적인 실재'를 다시 우리의 것으로 가져오는 문제, 즉 재전유의 문제를 철저히 끌어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다. 마지막 부분에서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유명한 테제를 스피노자를 빌어 '이성의 낙관주의, 의지의 비관주의'로 뒤집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초역 이후 검토 과정을 거치지 못한 글이다. 번역 상의 오류에 대한 지적을 환영한다.
원문은 아래의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generation-online.org/p/fp_negri21.htm



코뮤니즘 : 그 개념과 실천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

안또니오 네그리

역사적 유물론의 기저에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주장이 놓여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서 계급투쟁을 연구한다. 그 비판은, 계급투쟁 역사의 의미는 코뮤니즘, 즉 “사물의 현재 상태를 폐지하는 실재적 운동”(맑스, 「독일 이데올로기」)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이러한 운동의 내부에 있는 한 가지 사례이다.

사람들은 종종 정치경제학 비판이 역사철학의 한 표현이라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비판의 정치적 의미를 역사적 텔로스(telos)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생산력들은 통상적으로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그것들을 봉쇄하고 지배하는 제도들을 생산한다. 이것은 모든 역사적 결정(determination)들에서 명백하다. 그런데 왜 어떤 이들은, (유효한 계급투쟁의 의미에 따라) 이러한 상황을 전복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명령으로부터 생산력들을 해방시킬 가능성을 역사적 환상, 정치적 이데올로기 혹은 형이상학적 헛소리로 치부해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그와는 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1) 코뮤니스트들은 역사는 언제나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에게 이러한 입장은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자본에 의해 규정되고,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완전히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서 저와 같은 가정은 실효성이 없고 입증될 수도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자본은 언제나 힘(power)의 관계이며, 그것이 견고하고 압도적인 헤게모니를 조직할 수 있다 해도 이 헤게모니는 언제나 힘의 관계 내부에 있는 특정한 명령의 기능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잊고 있다. 자본의 개념과 그 역사적 변형태들 모두,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면서도 언제나 자본을 생산하는 산노동(living labour)인 프롤레타리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계급투쟁은 지배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표현되는 역관계(power relation)이다. 이 관계가 착취와 자본주의적 명령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이윤의 순환과 생산을 조직하는 제도들 속에 확립된다.

역사는 단순히 계급투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들은 ‘사용가치(use-value)’가 영구적으로 존속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사용가치를 노동력의 가치 혹은 인간노동의 환경적 상황과 자연의 가치로 여긴다. 이러한 생각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설명으로서 근본적으로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 형태에 관한 기술로서도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자본은 삶세계(life-world) 전체를 정복하여 덮어 싸고 있으며, 그것의 헤게모니는 전지구적이다. 나로드니키(narodniki)[각주:1]를 위한 공간은 없다! 계급투쟁은 여기, 즉 ‘지금 실존하는 전제들’로부터 발전하는 것이지, 다른 상황들로부터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관계는 이러한 역사적 결정들(역사적 결정론 historical determinism)과 주체성(지배자와 노동자 모두)의 새로운 생산에 근거한다.

우선, 이러한 맥락에서 더 이상 ‘외부’는 없으며, 오늘날 투쟁은 ― 투쟁뿐만 아니라 투쟁하는 주체들의 실체도 ― 전적으로 ‘내부’에 있다. ‘사용가치’와 유사한 혹은 그것을 반영한 어떠한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환가치’의 세계, 그 잔혹하고 포악한 현실에 완전히 잠겨 있다.

역사적 유물론은 계급투쟁에 있어서 교환가치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토록 중심적인지를 설명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노동자는, 예컨대, 객관성 없이 순전히 주관적으로만 거기에 존립한다. 그러나 그의 반대편에 존립하는 것은 이제 진정한 공동체(the true commuity[das wahre Gemeinwesen])가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그것을 “먹으려 애쓰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를 먹는다.”(Marx, Grundrisse, Notebook V, trans. by M. Nicolaus, London: Pelican, 1973, p. 496)

그렇다, 그러나 이 대안적 전유(appropriation) ― 노동자들의 전유에 맞선 자본가들의 전유 ― 에 있어서 자본은 명확히 하나의 관계로 나타난다. 코뮤니즘은,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을 목표로 삼아 공동체(community, Gemeinwesen)를 재전유하여 새로운 사회의 질서로 전환시키려 할 때 구체적 형상을 띠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교환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더 이상 노동, 화폐, 심지어 자본의 단순한 순환으로 환원될 수 없을 만큼 확립되고 보장된 공통적인 사회적 실재이다. 그것은 이윤으로 전환된 잉여가치, 축적된 이윤, 토지와 부동산으로부터 나온 지대, 고정자본, 금융, 주요자원들의 축적, 지구에서 생산적이며 이제 우주로까지 나아간 기계와 장치들,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들 그리고 ― 최종적으로 그리고 특히 ― 화폐, 거대한 공통적인 패러다임이다. “[화폐는] 그 자체로 공동체이며 자신 위에 다른 무엇이 존립하는 것을 견디지 못 한다”(Marx, Grundrisse, Notebook II, p. 223). 여기에 역사적 결정이 놓여있다. 교환가치는 이미 공통적인 형태로, 공동체로 주어진다. 교환가치가 여기이며, 교환가치가 세계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외부는 없다.

금융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누가 금융이라는 형태의 화폐 없이 살아가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화폐는 예전에 고향(Heimat)이 놓여있었던 공통적인 토지가 되었다. 화폐는 소유가 공유지(commons)로 조직되었던 ‘고딕 시대(Gothic period)’ 말에 주민들 사이에 존재했던 일관성(consistency)이 되었다. 그러한 공유지와 저 토지가 오늘날에는 자본가들의 수중에 있는 교환가치이다. 만약 우리가 이 토지를 돌려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수와 순결의 환상 하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발견한 조건 속에서, 즉 교환가치로 얼룩진 자본주의적 전유의 정점에서 요구[해야]한다.

스피노자가 히브리 국가에서는 희년(禧年, year of jubilee)[각주:2]에 모든 빚이 탕감되어 시민들의 평등이 회복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했을 때, 혹은 마키아벨리가 평민들의 토지 재전유가 또한 민주적 과정을 새롭게 했기 때문에 농업법(agrarian law)[각주:3]은 로마공화국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했을 때, 그들은 자연과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Niccolo Machiavelli, Discourse on Livy, Book I, Chapter 27, London: Penguin, p. 99; Benedict de Spinoza, A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Chapter XVII, p. 230)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노동력의 해방을 결정하고 코뮤니스트가 되는 일은, 본래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으로 바람직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노력과 피로 재생산한 이후에 우리에게 권력으로 맞서 있는 어떤 것인 공통적 실재의 재전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낙담하지는 말자. 그람시(Gramsci)가 계급투쟁에 대한 자신의 독해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역사적 유물론은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적 사회조직[화]의 프롤레타리아적 이용의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노동자 캐릭터의 지속적인 변신(變身, metamorphosis)[각주:4] 혹은 오히려 그것의 인류학을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새로운 문제를 도입한다. 노동자가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킬 때, 그/녀는 자본에게 실재적인 변화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투쟁의 시기구분이나 순환이 존재한다면, 그것의 존재론적 일관성은 이러한 인류학적인 기초에 견주어 측정될 것이다. 어떠한 자연, 정체성, 젠더 혹은 인종도 자본과 노동자들 간 관계의 이러한 변형과 역사적 변화의 운동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중은 이러한 동역학에 의해 형성되고 언제나 새로운 특질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계급투쟁에 있어서의 시간을 정의함에 있어서도 타당하다. 계급투쟁이 주체성의 생산과 변형으로 나타날 때, 혁명적 과정은 장기간의 시간성, 대항권력의 존재론적 축적, 프롤레타리아적 ‘이성’의 물질적 힘의 ‘낙관주의’, 연대(solidarity)가 되는 욕구, 언제나 합리적인 사랑 그리고 스피노자를 따라, 그와 관련된 ‘의지의 비관주의’를 전제한다. 자유의 정치적 구조들을 구축하기 위해 열정들이 동원될 때, 그는 “주의하라!”고 말했다. 우리의 길잡이는 반란의 우발적 출현, [다시 말해] 빛의 길을 밤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는 이러한 희망의 신적인 불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비판적인 조직화의 노력과 작업, 계산된 봉기의 위험이다. 철학적 상상력은 실재적인 것에 색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역사 형성의 노력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사건은 언제나 결과이지, 결코 출발점이 아니다.



영역 : Arianna Bove / 한역 : 윤영광

  1. [옮긴이]러시아어의 인민(Наро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운동을 인민주의라고 한다. 주로 1870년경에서 20세기 초엽에 러시아의 지식층인 나로드니키가 혁명 운동을 지도하였고, 차리즘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 러시아 농민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기조(基調)로 하였다. '인민 속에', 즉 '농민 속에' 들어가서 계몽 운동을 일으켜, 농민의 힘으로 차리즘을 타도하고, 인민 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었다(출처 : 위키백과). [본문으로]
  2. [옮긴이]성경에 나오는 규정으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출처 : 위키백과). [본문으로]
  3. [옮긴이]로마시대 공공 토지의 분배를 조절, 규제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 일인당 토지소유 한도, 낮은 지대를 통한 토지의 재분배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본문으로]
  4. [옮긴이]네그리에게 있어서 ‘살’ 혹은 ‘몸’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metamorphosis가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사용될 때는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 변신(變身)이라는 역어를 택한다. 그러나 같은 말이 자본 혹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나타낼 때는 맥락에 따라 변형, 변태, 변화 등 다양한 역어들이 대응될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