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먼즈

안또니오 네그리 / 코뮤니즘 : 그 개념과 실천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2)


"Communism: some thoughts on the concept and practice"의 두번째 부분은 국가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룬다. 네그리에 따르면 사적인 것 뿐만 아니라 공적인 것 또한 소외와 착취의 형태인데, 이는 근대의 모든 정치적 사유가 공유하고 있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이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사실상 무의미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공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모델의 고전적 형태인 사회주의 역시 코뮤니즘과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적이지도 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절대적으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삶과 생산을 관리할 수 있는 주체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주체성의 내재주의'와 '제헌권력'이다. 자본주의와 다른 형태의 공통적 삶의 구축을 가능하게 하는 저항적이고 특이한 주체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 내부로부터 온다. 그러한 주체들은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시기에조차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성의 웅성거림들은 제헌권력으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역사적 상황과 생산조건에 기초하면서도 도래할 혁명적 과정을 선취할 수 있는 정치적 구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번역 상의 오류에 관한 지적을 환영한다. 내용에 관한 토론이 덜 환영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2) 코뮤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국가에 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자본을 구성하고 자본가들과 프롤레타리아 노동력 사이의 충돌을 규율하는 관계들을 언제나 표준적으로, 그러나 또한 언제나 예외적으로 조직하는 힘이다.

이러한 국가에 맞서는 일은 노동력의 사적인 착취와 자본 순환의 사적인 통제뿐만 아니라 사적 재산 및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모든 조직화 양식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공적인 것, 즉 노동의 역능[각주:1]의 이 모든 소외 작용들의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배치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코뮤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공적인 것이 노동 ― 우리의 경우에는 공통적인 노동 ― 의 소외형태이자 착취형태라는 인식을 수반한다. 그래서, 공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그 위대한 루소(Rousseau)가 말했듯이, 공적인 것은 사적 재산의 적,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것이다(Jean-Jacques Rousseau, Second Discourse on the Origin of Inequality). 그러나 이 말은 단지 실제로는 모두에게 속한 것을 국가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궤변일 뿐이다. 국가는 말한다. “공통적인 것은 당신들에게 속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그것을 공통적으로 만들고 생산했으며, 그것을 공통적인 것으로서 창조하고 조직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통적인 것, 즉 우리 모두가 생산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의 국가에 의한 해방은 관리, 위임, 대의의 이름 아래로, [다시 말해] 공적 실용주의(pragmatism)의 무자비한 아름다움 아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코뮤니즘은 사회주의의 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적 역능의 두 번째[즉, 공적인 - 옮긴이] 소외 모델의 고전적인 형태이며,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주체성 생산 조직[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real socialism)’의 왜곡들은 한 세기의 계급투쟁을 중성화시켰으며, 역사철학의 모든 환상들을 일소해버렸다. 어째서 ‘현실 사회주의’가, 대중적인 집단화 과정들을 창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법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혹은 인문과학과 관련된 것이든 간에 명령의 규율들을 단 한 번도 문제시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회주의의 제도적 구조와 정치적 양극성(polarities)은 자의적으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대립시켰던 ― 그러나 루소에 따르면 양자는 서로 포개진다 ―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들의 명령 기능이 자본주의적 엘리트의 명령 기능을 재생산했으면서도 자신들을 스스로 선발된 ‘전위’라고 주장했던 지배계급을 신성시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산되었다.

국가에 맞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분할 및 부의 축적과 재분배를 포함하는 생산체계 전체를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방식 ― ‘모두의 민주주의’로서의 민주적인 방식 ― 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역사적 유물론은 ‘주체성의 내재주의(immenentism)’이기도 하다. 역사적 유물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시민들 그리고 모든 주체들은 다른 형태의 공통적 삶의 구축에 있어서 이 세계 ‘내부로부터(from inside)’ 언제나 존재하는 특이한 저항과 계기의 요소들이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주체들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가장 비통하고 황량한 역사적 고요의 시기에조차도 존재한다. 다중은 계급개념이며,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은 언제나 자본이 부과하는 예속관계에서 일어나는 저항의 핵심이다. 특이한 것은 복종해야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복종하지만, 언제나 거기, 역관계 내부에서 하나의 저항으로서 그렇게 한다. 이러한 관계의 파괴는 명령관계의 유지만큼이나 언제나 가능하다. 여기, 일체의 역사철학의 외부에서 그리고 이러한 공통적인 현상학 내부에서 우리는 권력 및 그것의 명령과 폐단에 대한 가능한 분노와 임금노동에 대한 (그리고/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에 예속된 노동에 대한) 거부가 다른 사회 모델의 형성에, 그리고 그것들이 다른 질서의 현재적 잠재성(virtuality)을 지시하는 정도만큼 다른 삶의 전망에 있어서 얼마나 중심적이고 본질적인지를 이해한다. 이것들은 파열을 향해 밀고 나아가며, 언제나 가능한 파열은 현실적으로, 혹은 오히려 필연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우리는 뒤에서 이러한 파열의 성격을 다시 다룰 것이다). 혁명은 존재할 수 있다.

분노, 거부 그리고 반란에 대한 주장은 제헌권력(constituent power)으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국가, 그리고 국가를 조직하고 재현하는 모든 헌법들에 대한 투쟁은 새로운 앎을 통한 새로운 권력[힘, power]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또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맨손으로는 결코 번개를 잡을 수 없다. 오직 다중, 반란의 계급투쟁 역사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과 주체성 생산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노동자 인류학의 이러한 지속적인 변신이 발전하는 영역들 가운데 하나이다.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은 지속적인 움직임 속에 있으며, 언제나 적합하면서도 상이한 주체성 생산에 조응한다. 이것이 현존하는 상황 속에서 혁명을 위한 표현과 욕구의 구체적 형태들을 발견해야만 하는 정치적 구성이다.

주체성의 생산과 새로운 정치적 구성은 혁명적 과정이 구축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들을 선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질적 결정과 집단적 욕구의 혁명적 긴장 사이에는 언제나 변증법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툭 끊어질 수도 있고,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는 하나의 고무줄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이중권력은 언제나 오래가지 못하며, 반란의 힘이 주체적 선취 속에서 역사의 시간을 되찾아와야만 한다(주체성의 전진). 제헌권력은 국가에 맞서 혁명적 의지를 선취하고 실현시키는 열쇠이다.

전통적인 국가이론에서 무정부 상태와 독재는 주권적 명령의 모든 가능한 형태들 가운데 정반대의 극단들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국가에 맞선 코뮤니즘적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정부 상태와 독재 사이의 가능한 매개를 근거로 하여 양자를 대립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양자택일을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혁명적 투쟁은 외부를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규정하는 내부는 전복적 권력 즉, 주권의 ‘위(above)’와 대립하는 ‘아래(below)’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적 존재는 이 ‘아래’로부터, 제헌적 욕구들이 권력[힘]의 표현과 대안적 내용으로 전환됨으로부터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람시가 가르쳤듯이 ‘자본에 맞선(against Das Kapital)’ 혁명 역시 존재할 수 있다.


영역 : Arianna Bove / 한역 : 윤영광

  1. [옮긴이]노동의 역능(the power[potenza] of labour)은 이미 자본의 생산관계 내에 포섭된 노동의 힘인 ‘노동력(labour)’과는 구별되는 노동의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힘을 가리킨다. 노동의 역능이 소외된 결과가 노동력으로 나타난다고 보아도 좋겠다. 그러나 반대로 노동력의 차원에서도 노동의 역능이 소외된 형태로나마 죽어 없어지지 않고 살아있으며, 살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본문으로]